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7일 오후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에 서명한 후 서로 손을 잡고 위로 들어 보이고 있다. 판문점/한국공동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7일 오후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에 서명한 후 서로 손을 잡고 위로 들어 보이고 있다. 판문점/한국공동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4·27 남북 정상회담 합의문 제목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입니다. 꽤 긴 내용이지만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남북관계 개선, 군사적 긴장 완화, 평화체제 구축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두 다 중요한 내용입니다. 어느 대목에 가장 눈길이 가십니까? 비핵화에 관한 내용일 것입니다.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였다. 남과 북은 북측이 취하고 있는 주동적인 조치들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대단히 의의있고 중대한 조치라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앞으로 각기 자기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위해 적극 노력하기로 하였다.”

이 내용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정확히 확인하려면 6월로 예상되는 북-미 정상회담의 결과를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 선언에서 맨 앞부분에 있는 남북관계 개선, 특히 통일 방안 부분을 유심히 읽어보았습니다. 사실은 이번 선언에서 남북은 통일 방안을 따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남과 북은 남북관계의 전면적이며 획기적인 개선과 발전을 이룩함으로써 끊어진 민족의 혈맥을 잇고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겨 나갈 것이다.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온 겨레의 한결같은 소망이며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의 절박한 요구이다.

남과 북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주의 원칙을 확인하였으며 이미 채택된 남북 선언들과 모든 합의들을 철저히 이행함으로써 관계 개선과 발전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나가기로 하였다.”

통일에 대해서는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겨 나갈 것”이라는 막연한 표현 뿐입니다. 하지만 “이미 채택된 남북 선언들과 모든 합의들을 철저히 이행함으로써”라는 대목이 오히려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알려진 선언문에는 ‘합의’가 아니라 ‘해방’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잘못 쓴 것이었다고 합니다.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에 대해 이뤄진 남북 간 선언 및 합의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입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시절입니다. 성명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조직지도부장 명의로 발표됐지만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라는 표현이 있기 때문에 사실상 박정희-김일성 두 정상의 합의입니다.

“쌍방은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 원칙들에 합의를 보았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이번 문재인-김정은 판문점 선언의 ‘자주통일’이라는 표현도 바로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7·4 남북공동성명은 이 밖에도 긴장 완화, 비방 및 무장도발 금지, 남북교류 실시, 남북적십자 회담, 직통전화 설치,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등 중요한 합의를 담았습니다.

다음은 1991년 12월 13일의 남북기본합의서입니다. 1990년 9월 제1차 고위급회담을 시작한 이후 15개월 만에 채택된 합의서입니다. 정식 명칭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입니다. 정원식 국무총리와 연형묵 정무원 총리가 서명했지만 사실상 노태우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당사자였습니다. 서문과 4장 25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통일의 3대 원칙을 서문에서 재확인했습니다.

통일 방안은 아니지만 1991년 12월 31일 남북한이 함께 한반도의 비핵화를 약속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도 있었습니다. 그 뒤 김영삼 정부에서는 1994년 남북 정상회담에 합의했지만,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정상회담이 무산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마중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손을 맞잡고 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마중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손을 맞잡고 있다.

첫 번째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것은 2000년 김대중 정부였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분단 이후 최초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고 6·15 선언을 채택했습니다. 길지 않으니 전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남북공동선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정상회담을 가졌다. 남북 정상들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이번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이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2000년 6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

6·15 선언에서 통일 방안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대목입니다. 1972년 ‘통일 원칙’에 이어 ‘통일 방안’에 대한 합의를 이룬 것입니다. 이 한 줄의 합의를 이루기까지 상당한 진통이 있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 과정을 자서전에 상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다소 길지만 공부하는 셈 치고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논쟁은 통일 방안으로 이어졌다. 김 위원장은 첫째 민족 자주 의지를 천명하고, 둘째 연방제 통일을 지향하되 당면하게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부터 하자는 데 합의하고, 셋째는 남북 당국 간 대화를 즉각 개시하여 정치·경제·사회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으로 합의하자고 제의했다. 나는 ‘2체제 연방제’ 통일 방안은 수락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주장하는 ‘남북연합제’는 통일 이전 단계에서 2체제 2정부의 협력 형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연합제’ 방식이 곧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며 연방제라는 표현을 고집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임동원 원장이 나의 양해를 얻고 연합제와 연방제의 다른 점을 설명했다.

“연방제와 연합제는 개념이 다른 것입니다. 연방제는 연방 정부, 즉 통일된 국가의 중앙 정부가 군사권과 외교권을 행사하고, 지역 정부는 내정에 관한 권한만 행사하게 됩니다. 연합제는 이와 달리 각각 군사권이나 외교권을 가진 주권 국가들의 협력 형태를 말합니다.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이후 성립된 CIS(독립국가연합)가 비슷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가 주장하는 ‘남북연합’이란 통일의 형태가 아니라 통일 이전 단계에서 남과 북의 두 정부가 통일을 지향하며 서로 협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말합니다. 통일된 국가 형태를 말하는 ‘연방’과는 다른 개념임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김 위원장이 자신의 생각을 다시 말했다.

“대통령께서는 완전 통일은 10년 내지 20년은 걸릴 거라고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완전 통일까지는 앞으로 40년, 50년이 걸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말은 연방제로 즉각 통일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냉전 시대에 하던 얘기입니다. 내가 말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것은 남측이 주장하는 ‘연합제’처럼 군사권과 외교권은 남과 북의 두 정부가 각각 보유하고 점진적으로 통일 추진하자는 개념입니다.”

내가 다시 나섰다.

“통일 방안은 여기서 합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남북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 대해 앞으로 계속 논의하기로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합의합시다.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가 뜻은 같은 것이니까,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남북이 협력해 나가자고 합시다.”

김 위원장은 연방제라는 용어에 집착했다. 내가 다시 이를 절충하여 대안을 내놨다.

“북이 낮은 단계 연방제를 제의했고 남이 남북연합제를 제의했는데 말씀하신 대로 양자 간에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함께 논의해 나가는 것으로 합의합시다.”

“좋습니다. 그 정도로 합의합시다.”

이렇게 해서 매듭 하나를 풀었다.

(중략)

다시 회담이 시작되었다. 김 위원장이 내게 물었다. 다소 공격적이었다.

“통일 방안에 대한 야당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한나라당은 왜 남북관계의 개선 문제에 대해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마찰을 일으키는 겁니까. 이번 평양 방문에는 왜 한 사람도 보내지 않은 겁니까.”

“우리의 통일 방안은 1989년 현 야당이 집권했을 때 여야 합의로 마련된 것으로 야당이 근본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나라당은 남북관계 개선으로 대한민국의 주체성과 안보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물론 그것은 기우지요. 그리고 대북 지원에 대해서는 ‘엄격한 상호주의’를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어요. 사실 이번 평양 방문에 개인적으로는 동행하고 싶어 하는 야당 의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따님인 박근혜 의원도 동행하겠다고 발표했으나 한나라당 지도부에서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아무리 좋은 합의를 하고 남북관계를 개선해 나간다고 해도 만약 그런 한나라당이 차기에 다시 집권하면 원점으로 돌아가는 거 아닙니까. 대통령께서는 한나라당이 차기에 집권한다면 대북 정책이 어떻게 될 것이라 보십니까.”

“한나라당이 지금 야당이다 보니 정략적으로 그러는 거지 만약 집권한다면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남북연합은 그들도 주장한 것이고 남북이 평화 공존하자는 데 이의가 없을 겁니다. 물론 구체적인 정책 이행 방법상에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김정일 위원장은 남한에서 정권이 바뀌어 야당이 집권할 경우 통일 방안에 대한 합의가 물거품이 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쪽의 ‘남북연합’ 안이 1989년 노태우 정부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강조하며 김정일 위원장의 걱정을 덜어주려 했던 것입니다.

남북연합은 1989년 9월 11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국회 특별연설을 통해 제시한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의 핵심입니다. 남북정상회의, 남북각료회의, 남북평의회, 공동사무처 등이 포함된 ‘남북연합’을 구성해 남북 간 개방과 교류협력을 실현하고 민족사회의 동질화와 통합의 기반을 다져 나가자는 제안입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2차 남북 정상회담은 2007년에 이뤄졌습니다. 2차 남북 정상회담 합의문의 제목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입니다. 내용이 상당히 긴 편입니다. 전문과 앞부분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 노무현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의 합의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였다. 방문 기간 중 역사적인 상봉과 회담들이 있었다. 상봉과 회담에서는 6·15 공동선언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남북관계발전과 한반도 평화, 민족공동의 번영과 통일을 실현하는 데 따른 제반 문제들을 허심탄회하게 협의하였다. 쌍방은 우리 민족끼리 뜻과 힘을 합치면 민족번영의 시대, 자주통일의 시대를 열어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표명하면서 6·15 공동선언에 기초하여 남북관계를 확대, 발전시켜 나가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남과 북은 6·15 공동선언을 고수하고 적극 구현해 나간다. 남과 북은 우리 민족끼리 정신에 따라 통일 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며 민족의 존엄과 이익을 중시하고 모든 것을 이에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6·15 공동선언을 변함없이 이행해 나가려는 의지를 반영하여 6월 15일을 기념하는 방안을 강구하기로 하였다.

(후략)

2007년 10월 4일

평양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

2차 정상회담 합의문에서 2000년 6·15 공동선언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이 눈에 띕니다. 연합제나 연방제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내용상 6·15 공동선언의 핵심인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을 다짐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결국 박정희 정부에서 채택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 원칙이 1989년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의 남북연합 안과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로 이어졌고, 다시 2000년과 2007년의 남북 정상회담, 그리고 2018년 판문점 선언까지 46년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2018년 4·27 선언에 담긴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정책과 통일 방안은 박정희-노태우-김대중-노무현 전직 대통령의 한반도 정책과 통일 방안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반도 정책과 통일 방안에 관해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김대중-노무현의 계승자가 아니라 박정희-노태우-김대중-노무현의 계승자라는 얘깁니다.

마찬가지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한반도 정책과 통일 방안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한반도 정책과 통일 방안을 계승한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갈 점이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본래 법조인입니다. 한반도 문제에 그리 밝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전쟁 위기로 치닫던 한반도 정세를 돌려 세우고 이번 남북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그 저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비밀은 ‘2007년’입니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실장이었습니다. 남북 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이 바로 문재인 비서실장이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1년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에 2차 정상회담 추진 배경과 평가를 자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간추리면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노무현 정부의 남북 정상회담 기본 원칙은 국정원, 통일부 등 대북 관련 공식기구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6자회담을 통해 북핵 문제가 타결된 뒤에만 남북 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2005년 6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평양으로 가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습니다. 2005년 9월 6자회담에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9·19 공동성명이 채택됐지만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마카오 주거래은행인 비디에이 내 북한 계좌를 동결했습니다. 북한은 2006년 7월 미사일 발사 실험에 이어 10월 초 핵실험을 했습니다.

2006년 11월 김만복 원장이 국정원장에 취임하면서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했습니다. 2007년 5월 비서실장, 안보실장, 국정원장 3인의 ‘안골 모임’이 만들어졌습니다. 6월 초 우리 정부가 주도한 구상으로 비디에이 문제가 풀렸습니다. 남북 접촉이 시작되면 문재인 비서실장이 북한에 특사로 가기로 되어 있었지만 7월 17일 아프가니스탄에서 샘물교회 피랍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김만복 원장이 북한에 갔습니다. 남북 정상회담 날짜는 8월 28일로 잡혔습니다. 그러나 북한에 수재가 났고 정상회담은 10월 초로 연기됐습니다.

문재인 비서실장은 정상회담 준비를 훨씬 충실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어가는 장면을 건의했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작위적인 이벤트를 싫어했습니다. ‘북측하고 이미 그렇게 하기로 합의했다’고 보고해서 겨우 수락을 받아낸 뒤 북측에서도 나중에 동의를 해줘서 허위보고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노란 선을 걸어서 넘어가는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은 2007년 정상회담의 가장 큰 상징이 됐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6자회담이 풀려서 정상회담 분위기가 무르익을 시점에 터진 미국 재무부의 비디에이 동결조치가 남북 정상회담까지 동결시키고 말았다”며 “그 바람에 한 1년을 공백으로 흘려보냈다. 그 공백 없이 정상회담이 열렸으면 남북관계는 훨씬 많은 진도가 나갔을 것”이라고 무척 아쉬워했습니다. 또 “남북 간 평화라는 건 신뢰를 통해 이뤄진다”며 “서로 믿지 못하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고 밝혔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07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쌓은 이런 깊고 넓은 경험이 2018년 세 번째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상당히 큰 도움이 됐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화보] 4·27 남북 정상회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