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갑질 논란> ① 공포가 돼 버린 갑질 '횡포'…"사람 냄새도 싫다"
의료·금융·도소매업종 여성 감정노동자 45%, 스트레스 '위험수준'
<※ 편집자주 = 상류층의 천박한 특권의식을 조롱하는 '갑질'이란 말은 이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상이 됐습니다. 병원, 은행, 대형마트, 백화점에서는 고객이라는 '왕'이 된 '노동자'들이 또 다른 노동자들을 절망하게 하는 일이 매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자신도 모르게 가해자가 되는 우리와, 남모를 고통을 겪다 일터를 떠나는 또다른 우리의 모습을 진단하고, '한국식 갑을관계'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보는 기획기사 4꼭지를 일괄 송고합니다.>
(서울=연합뉴스) 구정모 김은경 기자 = 서울의 한 대학병원 채혈실에서 일하는 A(여)씨는 매달 '진상' 환자를 2∼3명 겪는다.
채혈이 끝나면 5분간 주사를 놓은 곳을 누르라고 안내하지만 지혈하지 않고 멍이 들었다며 난리 치는 환자, 의사만 알 만한 내용을 물어보고는 답을 듣지 못하자 자기를 무시한다고 따지는 환자도 있다.
아기를 데려온 부모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아이가 무서워 몸부림칠 때 부모가 붙잡아주면 좋으련만 실패해 다시 바늘을 꽂으면 '당신이 제대로 못 해 우리 아이를 아프게 한다'며 역정을 내는 일이 왕왕 있다.
A씨는 "화가 나고 억울해도 우리는 늘 죄송하다고 말한다"며 "욕설뿐만 아니라 '잘라버리겠다', '병원에 불을 지르겠다' 등 별별 소리를 다 듣는데 그럴 때마다 그만두고 싶다"고 씁쓸해했다.
은행 영업점 창구 직원 B(여)씨는 고객에게 말을 건넬 때마다 미소를 띠고 있지만 속으로는 늘 불안에 떤다.
필요한 사항을 안내할 때 고객이 절차가 복잡하다며 화를 내거나 대답하지 않고 억지를 부릴까 걱정돼서다. 언제부턴가 고객의 표정을 살피는 버릇마저 생겼다.
B씨는 "점잖아 보이는 중년 남성이 신분증 없이 주민번호를 불러주며 계좌의 돈을 확인하고 싶다고 해서 금융실명제 때문에 안 된다고 했더니 '내가 내 돈 보겠다는데 너희가 뭘 아느냐, 내가 누군지 아느냐'며 소리를 질렀다"며 "배운 사람인 듯 보였는데 '갑질'에는 그런 것이 상관없더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C씨는 대형마트 고객만족센터에서 일하면서 삶이 망가지기까지 했다.
싫은 표정 한 번 짓지 못하고 하루에도 고객 여러 명에게 폭언에 가까운 말을 들어야 했던 그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통증을 느끼다가 결국 직장을 그만뒀다.
C씨는 "이제 사람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난다"며 "대인기피증으로 집에서 보낸 세월이 벌써 1년이 넘었다"고 전했다.
얼굴을 마주해야만 '갑질'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항상 상냥한 목소리로 고객 전화에 응대해야 하는 서울시 120 다산콜센터의 한 직원은 "시민이 폭언이나 욕설, 협박 등을 할 때 겉으로는 태연한 척 웃지만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린다"며 "이런 일들이 반복되니 목이 조여오는 것 같아 하루하루가 지옥이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최근 발생한 백화점 스와로브스키 매장 갑질 사건 등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됐던 갑질 횡포는 일부 특권층만의 빗나간 행동이 아니었다.
고객을 상대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종에 종사하다 보면 누구나 평범한 사람들에게 당하는 현실이다.
이른바 '감정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이들은 전국적으로 560만∼740만명으로, 전체 임금 근로자 10명 중 3∼4명꼴에 달하는 것으로 정부는 추산하고 있다.
시민단체인 '감정 노동자 보호입법을 위한 전국네트워크'가 올해 6월 의료·금융·도소매업종 노동자 2천244명을 대상으로 감정 노동자의 의식·실태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심각한 갑질 횡포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대하기 어려운 고객을 응대하면서 발생하는 스트레스 부하와 갈등의 정도가 '위험' 수준에 도달한 비율이 여성은 45.1%, 남성은 15.9%에 달했다.
위험 수준에 있다는 것은 이런 문제로 심리적인 손상을 입거나 생산성이 떨어지는 등의 문제가 발생할 개연성이 있다는 의미다.
'공격적이거나 까다로운 고객을 상대해야 한다', '나의 능력이나 권한 밖의 일을 요구하는 고객을 상대해야 한다'는 등의 관련 항목에 응답자가 매긴 점수를 계산해 일정 기준을 넘어서면 '위험' 수준으로 판단한다.
노동자의 실제 감정과 직장에서 요구하는 감정표현의 충돌로 발생하는 감정 부조화, 고객 응대에서 발생한 심리적 손상 정도는 여성의 60.6%가 위험 수준에 있었다. 남성 역시 25.4%로 적지 않았다.
서비스업 종사자들은 고객뿐 아니라 회사 눈치도 봐야 했다.
감정노동 수행에 대한 회사 내 감시의 정도와 고객응대에 대한 평가가 승진이나 인사고과에 반영되는 정도가 위험 수준인 비율이 여성은 52.2%, 남성은 23.0%였다.
실제 회사에서 불이익을 받았다는 이들도 14.8%에 달했다. 이들의 41.4%는 남들 앞에서 모욕을 받았고 28.8%는 임금, 성과금 등에서 불이익을 당했다.
감정 노동자들이 느끼기에 고객의 갑질 횡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었다.
'지난 한해 폭언, 폭력, 성희롱 등 악성고객이 줄었나'라는 물음에 74.8%가 '별로 그렇지 않다'(48.7%)거나 '전혀 그렇지 않다'(26.1%)고 답했다.
'고객이 전반적으로 무리한 요구를 적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역시 75.7%가 '별로 그렇지 않다'(48.1%)거나 '전혀 그렇지 않다'(27.6%)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와 함께 금융경제연구소가 작년 은행·카드회사의 콜센터와 영업창구 종사자 3천8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이들은 한 달에 19.4회 무리한 사과 요구, 인격 무시, 욕설 및 폭언, 성희롱·성추행 등 악성민원에 시달렸다.
악성 민원인에게 시달린 직원의 52.2%는 회사에서 오히려 '업무에 집중하라'고 요구받았다.
심지어 '악성 민원인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도록 했다'는 경우가 24.4%, '인사상 불이익 조치를 받았다'는 사례도 15.1%나 됐다.
pseudojm@yna.co.kr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