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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화해'의 정치인, 넬슨 만델라 영원히 잠들다

남아공 인종차별주의 반대운동의 상징... 향년 95세 일기로 타계

13.12.06 09:29l최종 업데이트 13.12.06 10:35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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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년 95세 일기로 세상을 떠난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전 대통령.
ⓒ 넬슨 만델라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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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이러한 아프리카 사람들의 투쟁에 헌신했습니다. 백인 지배에 맞서 싸웠고, 흑인 지배에 맞서 싸웠습니다. 모든 사람이 조화롭게 동등한 기회를 누리며 함께 사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라는 이상을 품었습니다. 나는 그러한 이상을 위해 살고 그러한 이상을 실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그것을 위해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넬슨 만델라, 1964년 4월 20일, 리보니아 재판 최후 진술에서)

인종차별주의 반대 운동의 상징이자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대통령인 넬슨 만델라가 향년 95세를 일기로 5일(현지시각) 세상을 떠났다.

제이콥 주마 남아공 대통령은 긴급 성명을 통해 "그가 평화 속에 잠들었다, 남아공의 위대한 아들을 잃었다"며 만델라 전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국민들에게 전했다. 그간 만델라는 폐감염증으로 수차례 병원신세를 지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왔다. 주마 대통령은 만델라가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하게 숨졌다고 전했다.

족장의 아들에서 '아파르트헤이트 투사'로

롤리흘라흘라 만델라는 1918년 7월 18일, 트란스케이에 있는 음베조에서 템부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쿠누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그에게 '넬슨'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1939년, 남아공 유일의 흑인 대학교인 포트하레 대학교에 입학한 만델라는 이듬해 시위에 나섰다는 이유로 제적당한다.

1941년, 만델라는 중매결혼을 피해 요하네스버그로 떠난다. 그는 2010년 펴낸 자서전 <나 자신과의 대화>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족장의 자리에 오를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강제 결혼을 피해 달아났어요. 그것이 내 앞날을 바꾸어 놓았어요."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금광에서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던 만델라는 1942년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 National Congress·ANC) 모임에 비공식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다. ANC는 1912년 창설된 반 아파르트헤이트 조직이다. 1943년 비트바테르스란트 대학교 법학부에 들어간 만델라는 1944년 ANC 청년동맹을 공동 창립하고, 1952년에는 ANC 부회장의 자리까지 올라가게 된다.

그 해,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 불복종 운동을 벌이다 체포된다. 1956년 그는 반역죄로 또 다시 체포된다.

"나는 그전에도 감옥에 간 적이 있지만 경미한 위반 때문이었고, 당시 하루 온종일도 아닌 하루에 가까울 정도로만 갇혀 있었어요. 그때 경찰에 체포된 이유는 내가 법을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른바 백인들만을 위한다는 백인 전용 화장실에 들어가 소변을 본 탓이었어요. 백인 세면장에 손을 씻으러 들어갔다가 체포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네. 어쨌든 내 실수였어요. 표지판을 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경찰서로 잡혀갔고, 하루가 끝날 무렵에 풀려났지요. 그런데 경찰서 감옥에는 원칙 때문에, 불공정하다고 보는 법에 대한 항의 때문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어요. 내 또래 학생들이 국민과 조국을 향한 사랑으로 교실을 떠나 저항하다가 붙들려 온 것이었어요. 감옥에서 그들을 만난 것이 내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지요."

1961년 만델라는 ANC의 군사 조직 움콘토 웨 시즈웨(MK)의 초대 총사령관이 된다. 간디식의 '비폭력투쟁'이 아닌 '무장투쟁'과 관련해 만델라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밝혔다.

"평화적인 방법을 써야 하느냐 폭력적인 방법을 써야 하느냐는 순전히 상황에 따라 결정돼요. 그리스도가 폭력을 쓴 것은 그 상황에서는 그것이 그가 쓸 수 있는 유일한 언어였기 때문이에요.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없어요. 그것은 상황에 달려있어요. 그게 내가 그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에요."

1962년 군사훈련과 ANC에 대한 지지를 모으기 위해 아프리카 12개국과 영국 런던을 방문한 만델라는 여권 없이 출국하고 노동자 파업을 선동한 죄로 그 해 8월 체포돼 5년 형을 받는다. 요하네스버그로 떠나온 지 20여 년, '족장의 아들'이었던 시골 소년 만델라는 반 아파르트헤이트 투쟁에서 가장 인기 있고 유명한 인물이 되어있었다.

350년 인종분규 종식... '보복'아닌 '용서와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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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이 95세 일기로 타계했다. 사진은 넬슨 만델라의 95세 생일 당시 모습.
ⓒ EPA/NIC BOTH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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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1964년 리보니아 재판에서 만델라는 종신형을 선고 받고 라벤 섬에 수감된다. '466/64' 만델라의 죄수번호다. 그는 1982년 케이프타운 교외 폴스무어 교도소로 이감될 때까지 라벤 섬에서 20여 년을 보낸다.

수감 생활은 열악했다. 장기간의 수감생활과 강제노역으로 그는 폐결핵 등 각종 질환을 앓았다. 옥중의 만델라는 세계 인권운동의 상징이 된다. 1979년 자와할랄 네루상, 1981년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1983년 유네스코의 시몬 볼리바 국제상을 받은 것도 이 시기다. 1990년 2월, 27년이 넘는 수감 생활 끝에 만델라는 출소한다. 1991년 ANC 의장에 선출된 그는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 대통령 백인정부와 협상해 350여 년에 걸친 인종분규를 종식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 클레르크 대통령과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1994년 4월, 남아프리카 사상 최초의 다인종 선거가 실시되었다. 1인 1표의 민주적인 선거가 실시된 것도 이때가 처음이다. 이 선거에서 넬슨 만델라가 이끄는 ANC가 60%가 넘는 유효투표를 얻으면서 승리한다. 그 해 5월, 만델라는 민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된다.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만델라는 '용서와 화해' 정치인이기도 하다. 1995년 만델라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데스몬드 투투 남아공 성공회대주교를 위원장으로 하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를 설치했다. 위원회는 아파르트헤이트 기간에 자행된 인권침해실태를 조사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하는 청문회가 열렸고, 피해 보상과 가해자 처벌이 이루어졌다. 진상조사는 백인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흑인 투쟁 조직의 테러도 공평하게 조사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진상'을 파헤치는 것과 동시에, 가해자가 진심으로 죄를 뉘우칠 경우 사면을 진행했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2만 1000여 건의 피해 신고가 들어왔고, 5392명이 처벌, 849명이 사면을 받았다. 위원회는 1998년 3500여 쪽에 달하는 보고서 제출을 끝으로 활동을 마쳤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보복없는 과거청산'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1999년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5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다. 2001년 전립선암 진단을 받은 그는 2004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며 '은퇴'를 선언한다. 2009년, UN은 만델라의 생일인 7월 18일을 '세계 넬슨 만델라의 날'로 정했다.

이처럼 '살아있는 성인'으로 추앙받았던 그였으나 그 자신은 '성인'이라는 칭호를 부담스러워했다. 1994년 발간된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의 속편으로 쓴 미완성 원고에서 만델라는 이렇게 썼다.

"어렸을 때 나는… 시골소년에게 있을 수 있는 약점과 실수, 과오를 모두 가지고 있었고, 비전과 경험의 폭이 주로 내가 자란 지역과 내가 다닌 대학교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영향을 받았다. 나는 오만에 기대어 나의 약점을 감추려고 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동지들 덕분에 나와 다른 동료 죄수들이 무명의 존재에서 까닭 없이 두려운 존재, 아니면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격상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복역한 죄수 가운데 하나라는 아우라도 완전히 걷힌 적이 없지만 말이다. 감옥에서 심히 걱정했던 것 하나는 내가 나도 모르게 바깥 세상에 투사한 허상, 내가 성인(聖人)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며 '성인은 계속 노력하는 죄인'이라는 세속의 정의를 따르더라도 아니다."
Posted by 어니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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