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정치는 쇼’라고 한다. 정치의 민낯을 들여다보면 진실은 오간 데 없고 대중을 현혹시키는 각종 쇼가 범람하는 게 사실이다. “쇼”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쓰는 정치인은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인데, 최근 들어 부쩍 “쇼”란 말을 남발하고 있다.
그는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김정은과 문재인 정권이 합작한 남북 위장평화쇼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비정상적인 남북정상회담 합의가 이루어진 이면에 북한 김정은과 우리 측 주사파들의 숨은 합의가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노골적인 색깔론도 펼쳤다.
납득이 잘 안됐는데 같은 당 내에서 반발이 속출하고,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85%를 뛰어넘는 것을 봐서는 내 판단이 틀리거나 경도된 것 같지는 않다. 홍 대표의 뇌리에 박혀있는 생각과 자신이 정치행위라고 믿고 실천해 온 일들이 타인의 정치행위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형성했다고 보면 무리일까.
백번 양보해 남북이 합작해 ‘쇼’를 만들었다 치자. 하지만 쇼에도 품격이 있는 법이다. 어린 시절, <쇼쇼쇼>라는 TV 인기 프로가 있었다. 요즘 말로 초호화 버라이어티 쇼였다. 명사회자 ‘후라이보이’ 곽규석씨의 재치있는 원맨쇼와 코미디언의 콩트, 그리고 유명가수들의 노래가 어우러진 명품 쇼에 대한 추억은 지금도 아련하다. 시골 장터를 떠돌던 유랑 악극단도 보는 이의 애환을 달랬지만 재미와 파격 면에서 <쇼쇼쇼>와 도저히 비교될 수가 없었다.
두 남북 정상을 비롯, 동행한 이들이 11시간59분 동안 판문점을 무대로 펼친 감동의 드라마를 주말 내내 보고 또 봤다. TV 화면을 뚫고 전달되는 선의와 환한 기운에 온몸이 가뿐해지고 때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전쟁의 위협으로 그동안 얼마나 불안해하며 가슴을 졸였던가. 두 정상이 손잡고 북한 땅을 잠시 넘나드는 장면, 봄 햇살을 받은 연초록을 배경으로 평생의 길동무처럼 도보다리에서 다정하게 앉아 환담하는 파격적인 모습은 역사에 길이 남을 평화의 상징이자 통일에의 염원이 구현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두 정상의 발길이 닿은 곳곳, 물 흐르듯 이어진 모든 프로그램에서는 진정성을 멋으로 녹여내려는 정성이 역력했다. 회담장의 그림 한 점, 기념식수에 뿌린 백두·한라의 흙 한 삽, 옥류관 냉면 등은 풍성한 얘깃거리와 함께 시선을 붙잡았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이 홍 대표에게는 혹세무민하는 ‘쇼’로 보였던 모양이다. 실제로 그렇게 보였다면 홍 대표의 감성과 판단력에 대해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반면 반대편 정치인을 깎아내리기 위해 마음을 숨기거나 속였다면 자신감이 없다고 볼 수밖에 없다. 주사파 운운하는 색깔론은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지겹고 시골 약장수의 호객행위처럼 신선함이 없다. 홍 대표의 발언은 한마디로 흥겨운 잔칫집에 찬물을 끼얹고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격이다. 평소 정쟁으로 맞설지라도 남북의 평화와 통일 분야에서는 여야가 있을 수 없다. 8000만명의 생명과 나라의 운명이 달려있는 절체절명의 사안에 남 말 하듯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모자란 점이 있다면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그 지혜를 모으는 경쟁에서 야당이 뒤처져서는 안될 것이다.
비핵화 선언이 실속이 없다는 비판도 그렇다. 말만 놓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닌 듯하지만 맥락을 보면 일종의 억지다. 비유컨대 학교에 안 가겠다고 떼쓰는 아이를 겨우 어르고 달래서 등교시켰더니 당장 90점 이상을 받아오지 않으면 퇴학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래전 남북 여성들의 만남의 장에 몇 차례 참가한 적이 있다. 인적·물적 교류에 앞서 허심탄회한 소통이 전제돼야 하며 그 소통을 위해선 상호존중과 끈질긴 인내심이 절대적임을 절감했다. 미국의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에이브러햄 링컨은 “위험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우리 안에서 솟아오른다”고 했다.
화창한 봄날 남북의 두 정상이 평화를 향한 2인3각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가을의 결실에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서 난만한 꽃들의 대잔치를 감상할 수도 있지만, 한여름의 무더위와 때론 태풍까지 견뎌내야 할지도 모른다. 모두가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러운 발걸음에 동참하고 마음을 모아야 할 것이다.
이 행렬에서 홍 대표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자유한국당은 대통령과 여당이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위장쇼”라고 깎아내리기보다는,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고 더 멋진 정치쇼로 경쟁해야 한다. 무조건 폄하하기보다 잘한 것을 가려 칭찬하는 용기가 있을 때 적절한 비판이 더 힘을 갖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