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26일 오랜 침묵을 깨고 수석비서관회의를 통해 국정원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혔지만 "국정원 사건과 무관하다"던 당초의 입장을 전혀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국정원의 불법대선개입을 자신과 연관짓는 것을 거부하고 "대선에서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고 선거에 활용한 적도 없다"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이로써 그동안 대통령의 사과와 입장표명을 줄기차게 요구해온 야당과 국민들의 간절한 바램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국정원 사건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인식은 국민여론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출처:구글이미지>
'생각하는 데로 살지 않으면 사는 데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국정원 사건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시각 속에 '사는 데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태생적 한계와 자기중심적 위선이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박 대통령의 헛발질
대통령이 오랜 침묵을 깨고 입장을 밝힌 시점에 주목해 보자. 야당의 장외투쟁으로 정국은 꽉 막혀있고, 국정원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야 할 국정조사는 새누리당의 무력화 시도 속에 누더기로 끝이 났다. 대학생, 대학교수, 시민단체, 종교단체, 중고등학생까지 시국선언에 동참하고 있고, 수 만명의 국민들이 거리에서 국정원 사건을 규탄하며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국정원 사건에 대한 대국민 여론은 점점 악화되어 가는 중이고 진실규명을 위해 특검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해 지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국정원 국정조사 특위 야당 의원들이 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3·15 부정선거'를 언급하며 청와대와 새누리당, 박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더는 물러날 곳이 없는 셈이다.
기로에 선 박 대통령은 기존 입장을 고수하며 한치의 물러섬없이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일 수 밖에 없다.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인정하는 것은 정권의 정당성을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대선 불복', '부정선거' 등을 언급하며 단호한 입장을 표명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에서 박 대통령에게 '사는 데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태생적 한계와 자기중심적 위선이 드러난다. 왜 그럴까?
■ 민주주의와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온 박 대통령
먼저 유신독재시대의 퍼스트레이디로서 민주주의와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온 박 대통령에게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그 가치를 계승·발전시켜야 한다는 대통령으로서의 책무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박 대통령에게는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과 철학 자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권은 그 시작부터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태생적 한계를 지닌 정권이었다.
또한 정권유지와 기득권 보호라는 절대명제가 국가와 국민보다 늘 상위개념이었던 통치의 시대를 살아온 박 대통령에게 국정원의 불법대선개입은 그 자체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급기야 자신이 임명한 검찰총장의 지휘아래 진행된 검찰의 공소사실조차 인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야 만다. 오히려 박 대통령의 시선과 관심은 대선과정과 그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야당과 국민들에게 향해 있다. '사는 데로 생각하는 삶'에 익숙해져 있는 박 대통령에게 이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도전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결정적 오류가 국민여론을 기만하는 비극적 위선을 낳고 있는 것이다.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은 그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며 실체적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 국민들의 인식은 박 대통령의 그것과 전혀 달라
그러나 박 대통령의 입장은 국민여론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서치뷰가 지난 8월21일 실시한 여론조사결과, 국정조사가 관련 의혹들에 대한 진상규명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응답이 69.9%였고, '충실했다'는 24.4%에 그쳤다. (휴대전화 RDD ARS 방식, 993명, 표본오차 ± 3,1P) 또한 가장 최근에 실시된 사회동향연구소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정조사를 통해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의 진상이 '충분히 규명되지 않았다'는 응답이 65.4%였고, '충분히 규명되었다'는 응답은 단지 21.2%에 불과했다. (휴대전화 RDD ARS 방식, 1049명, 표본오차 ± 3.0P)
이 같은 결과는 국민들 세 명 중 두 명이 국정조사를 통해 국정원에 의해 자행된 대선개입의혹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사건 해결을 위한 합리적 절차와 방식마저 철저히 무시했다. 국민들을 설득시키고 이해시키기 위해서 박 대통령은 야당과 국민들을 비판하기 전에 국정원 대선개입의혹의 진실을 확실히 규명했어야만 했다. 당연히 그것이 먼저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다른 길을, 그것도 지금까지 해오던 아주 익숙한 길을 택했다. 그동안 오불관언식 침묵으로 일관해 오더니 급기야 국정원 대선개입의혹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수많는 국민들의 한결같은 요구를 단 칼에 제압하려는 오기와 불통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이는 '사는 데로 생각하는 삶'을 살아온 박 대통령의 방식 그대로였다.
<지난 대선은 대통령이 아닌, 국민들이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내릴 것. 출처:구글이미지>
■ 판단은 대통령이 아닌 국민이 하는 것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결국 국민들이 판단할 일이다. 국민들이 국정원 대선개입의혹의 진상규명에 박근혜 정부와 여야 정치권이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촉구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국민의 합리적·이성적 판단을 위한 최소한의 요구조차 박 대통령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 채 점점 더 깊은 수렁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다.
박 대통령은 국정원 대선개입의혹에 대한 실체적 진상규명에 소홀하고, 이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대선불복'으로 몰아가는 것이야 말로 이번 사태를 점점 더 큰 파국으로 몰고가는 어리석은 짓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향후 박 대통령과 이 정권의 행보에 따라 더 많은 국민들이 거리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고 당당하게 외칠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를 갈망하는 국민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권력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런 면에서 역사는 예외를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박 대통령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