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위기에 빠트린 사건 세 가지의 결말

[김당의 나까프 ⑥] '신(新) 김기춘뎐' (3) : '법꾸라지'는 법망을 어떻게 빠져 나갔나

17.01.04 11:08l최종 업데이트 17.01.04 11:08l
 
'김당의 나까프'에서 '나까프'는 '나쁜X 까발리기 프로젝트'를 줄인 말입니다. 여기서 'X'는 '놈'일 수도 있고, '짓'일 수도 있습니다. '나까프'의 대상은 공인 중의 공인인 전·현직 국회의원과 장·차관급 공직자들입니다. 나아가 무력을 가진 군과, 공권력을 가진 이른바 4대 권력기관(검찰·경찰·국세청·국정원) 그리고 갈수록 힘이 세지는 대기업 회장들도 당연히 '나까프'의 대상에 포함됩니다. [편집자말]
☞ [신(新) 김기춘뎐(2)] 신직수가 점찍은 김기춘, JTBC '스모킹건'에 쓰러지나

박정희 유신체제는 중앙정보부가 만들고 중앙정보부가 닫았다. 6대 이후락 부장은 암호명 '풍년사업'으로 유신이라는 폭주기관차를 견인했고, 7대 신직수 부장은 그 폭주열차를 운전해 유신체제라는 무한궤도를 질주했다.

유신궤도가 노후화하고 폭주열차가 피로감을 느낄 때쯤 박정희는 고향 후배이자 육사 2기 동기생인 김재규(1926~1980년)를 8대 정보부장으로 기용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기대와 달리 김재규는 10.26 암살로 유신체제를 무너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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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 하에서 대통령 특명수사는 중앙정보부 6국장(안정국) 소관이었다. 각하의 안위는 곧 국가의 안위로 간주되던 시절이었다. 김재규 정보부장은 당시 '각하의 영애'가 명예총재인 구국봉사단의 최태민 총재 비리에 대한 진정이 계속 올라오자, 각하의 안위에 흠이 될까 걱정되었다. 그는 검사 출신의 백광현 6국장을 시켜 최태민을 조사토록 해 그의 비리를 박정희에게 직보했다.

<신동아>(2007년 6월호)가 공개한 중정 수사기록에 기재된 최태민의 부정행위는 ▲ 횡령 14건(2억2135만6천 원) ▲ 사기 1건(200만 원) ▲ 변호사법위반 11건(9420만원) ▲ 토지 (14만1330평) ▲ 권력형비리 13건 ▲ 이권개입 2건▲ 융자간여 3건 등 총 44건이었다. 최태민은 기업인을 구국봉사단 운영위원으로 위촉해 이들로부터 1인당 2천만~5천만 원의 입단 찬조비나 월 200만 원의 운영비를 받는 식으로 운영자금을 마련했다.

최태민 구국봉사단이 매년 기업인한테 거둔 돈은 현재 화폐가치로 1천억 원

 26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최태민편'의 한 장면.
 지난해 11월 26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최태민편'의 한 장면.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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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당시 운영비 200만 원을 금값을 기준으로 현재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2700만 원에 해당한다. 구국봉사단이 기업인들로부터 연간 3억 원 넘는 돈을 운영비조로 거뒀다는 얘기다. 위촉된 운영위원이 200~300명 쯤이었으니 현재의 화폐 가치로 환산해 연간 1천억원 가까운 거금을 거둔 셈이다. 이때 거둔 거금의 일부가 최태민의 다섯 번째 딸인 최순실이 재산을 불리는 데 종잣돈이 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물론 이 돈은 기업인들이 최태민을 보고 준 것이 아니고 대통령의 '영애'이자 퍼스트 레이디 대행인 박근혜를 보고 준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는 이를 정보부의 음해라고 우겼다. 박정희는 할 수 없이 1977년 9월 김재규-백광현을 배석시킨 가운데 최태민을 불러 이른바 친국(親鞫)을 벌였다. 그 자리에서 최태민은 '억울하다'고 했고, 박근혜는 울면서 하소연했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나중에 한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 최태민이란 놈이 목사라고 속이고 근혜한테 알랑거리고, 비비고 하니까 박 대통령이 그걸 모르겠어요? 참 애먹었지요. '최태민이 문제가 있다'는 걸 김재규가 대통령한테 얘기해서 박 대통령이 최태민을 데려다 야단치고 막 이랬거든요. 근데 근혜양은 '이게 중앙정보부에서 모함해서 그런 거다, 최태민은 아주 선량한 사람인데 왜 정보부에서 모략을 해 아버지 생각을 흐려 놓느냐'고 하면서 오해가 생겼어요."(김수길, 태자마마와 유신공주, 104쪽)

박정희는 어머니를 잃고 22살의 어린 나이에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떠맡은 딸을 안쓰러워했다. 철권 통치자도 "최태민 목사는 결백하다"는 박근혜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경호실장 차지철은 '영애'와 김재규 사이의 불신과 오해의 골을 파고들어가 최태민을 비호하고 김재규의 청와대 출입을 견제했다. 누구보다도 박정희를 존경했던 김재규의 충심은 실망으로 바뀌었다. 최태민 사건 처리에 대한 실망감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시해한 동기 중의 하나로 작용했다는 것이 10.26 사건 수사 관계자의 말이다.

박정희는 딸에게는 자애로운 아비였지만 체제 유지를 위해 공직자에게는 엄중했다. 박정희는 고위공직자 감찰에 중정 대공수사국을 활용했다. 원래 공직자 감찰은 감사원의 직무이고, 비위가 입증되면 검찰이 기소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공조직을 동원하면 보안 유지가 안 되었다. 그래서 박정희는 군 장성들을 포함한 고관대작들을 겁박하고 길들이는 수단으로 대공수사국을 활용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공직자가 사치품을 자랑하며 호화생활을 한다는 투서가 들어오면, 대공수사국을시켜 쥐도 새도 모르게 남산으로 끌고와 사실 확인 자술서와 각서를 받고 풀어주는 식이었다. 그러면 신문에는 기사가 안 나지만 당사자는 근신하게 되고 관가에도 소문이 퍼져 다른 고위 공직자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박정희 정권의 호위사령부였던 보안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독재자 특유의 '분할통치'였다.

철없는 '유신공주'가 최태민 싸고돌 때 터진 20사단 대대장 월북 사건

20대의 박근혜는 유신왕조의 철없는 공주였다. 박정희가 최태민을 싸고도는 딸 문제로 골머리가 아플 때인 1977년 10월 20일 전방 20사단의 대대장이 무전통신병을 대동하고 월북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만 해도 군내의 가혹행위나 비리 등으로 사병의 월북은 '연례행사'로 발생했지만, 장교의 월북은 드문 일이었다. '1953년 휴전 이후 월북한 국군 현황'이라는 국정원 대외비 자료에 따르면, 특히 1976년에는 처음으로 월북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1977년에 휴전 이후 최고 계급의 현역장교가 사병까지 대동하고 월북한 것이다.


'1953년 휴전 이후 월북한 국군 현황'에 따르면, 월북한 국군 장병은 총 453명으로 그 가운데 장교는 42명(9.3%)이다. 국민소득과 체제 경쟁에서 남한이 열세였던 1950~60년대 월북자가 391명(86.3%)으로 대부분이고, 1970년대는 42명(9.3%)로 감소했다. 장교의 월북 사건은 42명 중에서 37명(88.1%)이 1950~60년대에 발생했고, 1970년대는 4명(9.5%)으로 감소했다. 1980년대 이후로 월북한 장교는 1명뿐이다.

군이 발칵 뒤집혔다. 20사단은 물론, 사단 보안대도 책임을 은폐하는 데 급급했다. 언론 통제로 첫 보도는 사건 발생 엿새 만에 이뤄졌다. 그것도 월북이 아닌 피랍이었다. <경향신문>(10월 26일자) 1면 기사('대대장-통신병 국군장병 2명 북괴 피랍')에 따르면, 주한유엔군사령부는 "20일 북괴군이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을 불법으로 침투, 한국군장병 2명을 납치해갔다"면서 "26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 비서장회의에서 납치된 장병을 송환할 것을 북괴측에 강력히 요구했다"고 발표했다. 유엔군측은 조사결과, 납치된 장병은 대대장 유운학 중령과 무전통신병 오봉주 일병이라고 밝혔다.

'월북'이 '피랍'으로 둔갑 주한유엔군사령부는 20사단 보안대의 허위보고를 토대로 유운학 중령이 북괴군에 피랍되었다고 발표했으나 나중에 자진 월북으로 밝혀졌다(경향신문 77년 10월 26일자)
▲ '월북'이 '피랍'으로 둔갑 주한유엔군사령부는 20사단 보안대의 허위보고를 토대로 유운학 중령이 북괴군에 피랍되었다고 발표했으나 나중에 자진 월북으로 밝혀졌다(경향신문 77년 10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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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동아일보>는 군사정전위에 참석한 유엔군 케네드 A. 클레이파소 대령의 발표를 인용해 유엔군측 조사결과, 유 중령은 승진도 빨랐고 복무경력이 모범적이며 아내와 2명의 아들을 가진 가장으로 월북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유엔사는 보안대가 허위 보고한 줄도 모르고 그대로 발표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장병의 가족들이 한적(韓赤)을 찾아 국제적십자에 송환 협조를 요청했다는 소식을 끝으로 유중령 관련 기사는 신문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실상은 자진 월북이었다. 유 중령은 당일 경기도 연천 일대에서 DMZ 순찰 명목으로 운전병과 통신병을 태우고 가다가 권총을 꺼내 월북을 강요했으나 운전병이 거부하자 발에 총을쏴 부상을 입히고 통신병만 대동하고 월북했다. 월북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말들이 오갔으나 보안대의 횡포 때문이라는 말이 설득력이 있었다. 실제로 유 중령의 월북 후 일성이 "보안부대 등쌀에 못이겨 넘어왔다"였다고 한다. 유 중령과 함께 상무대보병학교 전술학처 유격대와 20사단에서 근무한 예비역 장교가 나중에 자신의 블로그에 쓴 내용도 비슷했다.

당시 김영동 20사단장은 대대ATT(전투력측정)에서 꼴찌를 하는 대대장은 보직해임을 시키겠다고 했다. 긴장한 대대장들은 보안대를 통해 ATT 평가단에게 로비를 했다. 그때만 해도 대대장들이 사단 보안대에서 파견 나온 병사에게 용돈을 주고 편의를 봐주는 것이 관행이었지만 보병학교대대 공격 우수교관 출신인 유 중령은 그런 관행을 거부했다. 그러다가 보안대의 농간으로 ATT 평가에서 꼴찌가 되어 보직 해임될 처지가 되자 월북해 버린 것이다.

1차위기 : 5공 시절, 충성맹세 후배에게 간청해 모면

 지난 1989년, 당시 김기춘 검찰총장이 검찰청에서 현안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지난 1989년, 당시 김기춘 검찰총장이 검찰청에서 현안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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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대대장의 월북 사건은 큰 파장을 몰고 왔다. 특히 그는 전술학교관 출신이어서 암호체계는 물론 전술교범-훈련체계도 바꿔야 했다. 교범과훈련체계 및 교리를 바꾸려면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다. 사단장 등 유 중령의 계선 상에 있는 지휘관들은 군복을 벗어야 했고, 연천의 20사단은 양평의 5사단과 주둔지를 교체하게 되었다. 보안대의 허위보고로 유엔사에 망신을 당한 박정희는 중정에 특명을 내렸다. 김기춘 5국장은 유운학사건을 재조사해 보안사의 월권 실태를 보고해 정보처를 폐지하는 등 보안사 권한을 크게 축소시켰다.

그러나 최고 권력자의 비호 아래 만들어진 위세는 권력이 기울면 함께 사라지는 법이다. 유신체제에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위기가 닥쳤다. 1979년 김재규 부장이 대통령을 시해한 10.26 사건으로 정보부는 '역적'이 되었다. 박정희가 만든 계엄법에 따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합수본부장이되어 권력을 장악했고, 부문(군) 정보기관인 보안사가 국가정보기관인 중정을 접수했다. 중정의 국장급 이상 부서장들은 전원 보안사 수사관들에게 굴욕적인 조사를 받고 일괄 사표를 제출했다.

중정을 접수한 보안사 요원들은 김기춘부터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김기춘은 청와대로 자리를 옮긴 터였다. 신직수가 1979년 대통령 법률특보로 가게 되자 김기춘을 청와대 법률비서관으로 부른 것이다. 김기춘은10.26 몇 달 전에 청와대로 옮긴 덕분에 운 좋게 화를 면하고 친정(검찰)으로 복귀해 서울지검 공안부장을 지냈다. 그러나 박정희와 신직수라는울타리가 사라진 김기춘은 어미 잃은 병아리 신세였다.

전두환 대통령 취임 후 첫 검찰 인사에서 보안사 출신의 허화평 대통령보좌관은 김기춘 공안부장의 검사장 승진을 탈락시켜 옷을 벗기려 했다. 당시 새 정부는 10년 이상 경력 검사200여명 중에서 20여명의 사표를 받았다. 박철언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기춘은 당시 대학-검찰 후배인 박철언 청와대 정무비서관에게 구명 요청을 했다. 박철언은 궁리 끝에 허화평에게 전달할 편지를 써달라고 했고, 김기춘은 '구구절절장문의 편지'를 써서 그에게 전달했다.

"일종의 충성 맹세인 이 편지를 나는 허 보좌관에게 전달하고 허 보좌관을 설득하여 김 부장의 구명에 나섰다. 덕분에 김기춘 부장은 천신만고 끝에 검사장으로 승진해 비교적 한직인 법무부의 출입국관리국장으로 발령이 났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정치근 검찰총장이 취임하면서 곧 '검찰의 꽃' 중 하나라는 법무부 검찰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박철언, 바른역사를 위한 증언1, 94쪽)

김기춘은 이듬해인 1982년 5월 5공화국을 뒤흔든 이철희-장영자 사건의 와중에 또 한 번 옷을 벗을 위기에 직면했다. 김기춘 검찰국장이 국회에서 검찰 수사가 장영자(대통령처 삼촌의 처제)가 아닌 이철희에게 초점을 맞춘 것은 대통령 지시 때문이라는 뉘앙스로 얘기했다는 보고가 대통령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노여움을 산 것이다. 박철언은 이때도 김기춘의 간청을 받고 전두환의 노여움을 푸는 데 총대를 멨다. 덕분에 김기춘은 옷을 벗는 것은 면하고 법무연수원 연수부장으로 좌천성 발령이 났다.

2차 위기 : 장관 때는 엄정 법집행, 선거법 기소되자 위헌제청해법망 탈출

권력에 미운 털이 박힌 그는 한껏 몸을 낮추어 3년 동안 연수부장으로지내면서 서울대에서 박사학위(1984년)를 땄다. 그렇게 법무연수원에서 3년을 버틴 끝에 1985년에 대구지검장으로 발령이 났고, 대구고검장을 거쳐 노태우 정권이출범한 1988년에 마침내 검찰총장이 되었다. 5공 시절 권력의 눈 밖에 나 찬밥 신세였던 김기춘은 1988년 총선에서 야당의 승리로 '5공비리 청산'의 과제를 떠안은 노태우 정부가 칼자루를 쥐어주기에 적임자였다. 그는 장세동 전 안기부장을 비롯해 쟁쟁했던 5공 인사 49명을 구속했다. 허화평은 사법처리를 면했다. 김기춘은 첫 임기제 검찰총장을 마치고 법무장관으로 승진했다.

1992년은 14대 총선과첫 지방선거, 그리고 14대 대선까지 치러진 '헌정 사상 최대 선거의 해'였다. 사법 당국은 어느 때보다도 공명-준법선거를 강조했으나 야당은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할 중립내각을 요구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대선을 두 달 앞두고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무당적-중립 선거내각을 출범시켰다. 두 번째 위기는 명백히 그가 자초한 것으로 50년 공직생활에서 유일하게 검찰에 기소된 '초원복집 사건'이다.

대선일을 일주일 앞둔 1992년 12월11일, 김기춘은 부산 대연동의 복국집에 기관장들을 모아놓고 '지역감정 조장'과 '공무원동원' 등 불법 선거운동을 모의했다. 김기춘은 두 달 전에 중립내각이 출범하면서 법무장관에서 물러난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전국을 돌면서 여당인 민자당 김영삼 후보 선거운동을 지원했다. 이날 모임에는 당시 김영환 부산시장, 정경식부산지검장, 박일룡 부산경찰청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우명수 부산교육청 교육감,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등이 참석했다.

불법선거 모의 사실은 관권선거 움직임을 포착한 당시 정주영 후보(국민당)측 정몽준 의원 쪽에서 현장을 도청해 녹음한 테이프를 공개함으로써 드러났다. 언론에 공개된 녹취록에 따르면, 김기춘은 기관장들을 모아 놓고 "중립내각이 나왔기 때문에 마음대로 못해서 답답해 죽겠다"며 은근히 관권선거를 조장했다. 또한 "부산·경남 사람들 이번에 김대중이 정주영이 어쩌니 하면 영도다리에서 칵 빠져 죽자"면서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돼"라고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검찰은 초원복집에 모인 기관장들을 "공식 석상이 아닌 사적 모임에서 나눈 대화를 가지고 처벌할 수는 없다"며 무혐의 처분하고 모임을 주재한 김기춘만 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 검찰은 김기춘에게 '선거운동원이 아닌 자의 선거운동' 죄를 적용해 징역 1년을 구형했다.

이번에는 꼼짝없이 유죄를 인정받을 형국이었다. 그러나 그는 김영삼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93년 3월 "선거운동원이 아닌 자의 선거운동을 규정한 구(舊) 대통령선거법 제36조는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와 참정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어 위헌"이라며 법원에 위헌제청을 신청했다. 유신헌법에 기초해 민주헌법 압살한 법비(法匪)가 헌법의 힘을 빌린 것이다.

그의 소망대로 헌법재판소는 이듬해 이 조항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고, 김기춘에 대한 재판은 '공소 취소'로 없던 일로 끝났다. 법무장관 재직 때는 선거법의 엄정한 집행을 강조했던 법조인이 막상 같은 선거법이 자신을 옥죄자 법의 힘을 빌려법망을 탈출한 것이다.

당시 선거사범 관련 통계를 보면, 그가 법무장관이던 1992년 총선 투표일 전날까지 610명의 선거사범이 입건되어, 이 가운데 42명이 구속되었다. 법망을 유유히 빠져나간 '법꾸라지 김기춘'은 그해 12월 19일 민자당국책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리고 1996년 총선을 앞두고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고향 거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2000~2004년 선거에서 연거푸 당선되어 3선 의원이 되었다.

3차위기 : '성완종 리스트'에 "작문이다" 부인, 최근 증거인멸의혹 불거져

청문회 출석하는 김기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7일 오전 여의도 국회에서 열리는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2차 청문회에 출석하기 위해 국회에 도착하고 있다.
▲ 청문회 출석하는 김기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지난해 12월 7일 오전 여의도 국회에서 열리는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2차 청문회에 출석하기 위해 국회에 도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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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9일 이명박정부 시절의 자원외교 비리의혹에 연루돼 사전 구속영장이 청구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영장실질심사 당일에 유서를 쓰고 잠적한 후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가 죽기 전에 남긴 메모에는 ▲ 허태열 7억 ▲ 유정복 3억 ▲ 홍문종 2억 ▲ 홍준표 1억 ▲ 부산시장 2억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외에도 '이병기' '이완구'라는 이름과 '김기춘 10만불 2006. 9. 26 독일 벨기에 조선일보'라고 적혀 있었다. 김기춘에게 사자(死者)의 저주와 함께 세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55자의 메모가 적힌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가 공개된 것이다.

돈의 액수와 날짜, 그리고 장소까지 특정한 메모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유일했다. 성완종 회장은 자살 직전 <경향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2006년 9월경 김기춘씨가 VIP(박근혜 대통령) 모시고 독일에 갈 때 10만 달러를 바꿔서 롯데호텔 헬스클럽에서 전달했다"라고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그러나 김기춘 실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9월 26일 해외에 있었다"면서 "'조선일보기사가 난 날짜'라고 하는데 상식적으로 돈 준 날짜를 기재해야지, 신문기사 날짜를 쓴 것은 작문이다"라고 10만 달러 수수 사실을 부인했다. 검찰은 김기춘을 한 차례 서면조사한 뒤 공소시효 완성을 이유로 '공소권없음' 처분을 내렸다.

그런데 12월 31일 한국일보 보도에 따르면, 김기춘 전 실장은 '성완종 리스트' 수사 때 관련 자료를 모두 파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2015년 4~5월 김기춘 실장은 측근들을 시켜 자신의 과거 업무나 행적이 담겨 있는 서류들을 모두 찢은 뒤 내다 버리도록 해 당시 버려진 박스가 4~5개에 달했다는 것이다. 당시 검찰의 압수수색이 이뤄지지 않아 결과적으로 '서류 파기'는 괜한 일이 됐지만, 검찰총장-법무장관까지 지낸 그가 철저한 사전 대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최순실 게이트'를 수사 중인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지난해 12월 26일 그의 평창동 자택을 압수수색했을 때도 최근 자료들은 거의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이번에도 핵심 증거들을 사전에 없애거나 은닉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치밀한 업무 스타일을 보여온 김기춘 실장이 1970년대 자료들까지 보관하고 있었지만, 정작 가까운 시기인 2013년 8월(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 취임) 이후의 자료들은 거의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그가 '최순실게이트' 관련 증거를 없애거나 은닉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확인되면, 증거인멸교사죄(5년 이하 징역 또는 700만 원 이하 벌금)로 형사처벌이 가능하다.

'법꾸라지 김기춘'의 50년 공직생활을 한 줄로 요약하면 '간첩은 조작하고, 지역감정은 조장하고, 증거는 인멸하고'이다. 그렇게 해도 위기가 닥칠 때면 지연과 학연, 그리고 법률 지식을 총동원해 법망을 빠져 나갔다. 학창시절부터 그의 좌우명은 '우리가 남이가'가 아니고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었다고한다. 명실상부한 실제 좌우명은 '진인사대관직'(盡人事待官職)이 아니었을까?

(*다음 편에는 <김기춘의 '우리가 남이가'에 숨은 '악의평범성'>이 이어집니다.)
Posted by 어니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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