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희 앵커와의 생방송 인터뷰 화제… 겸손ㆍ배려ㆍ통찰ㆍ성숙 등 빛나
일부 안티팬이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서태지(42)가 아니었다. 겸손, 배려, 여유, 성숙, 유머, 통찰…. ‘피터팬 증후군에 걸린 뮤지션’ 쯤으로 치부하기엔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깊고 넓고 따뜻했다. 서태지가 20일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종합편성채널 JTBC의 ‘뉴스룸’에 출연했다. 그가 생방송 뉴스에 등장해 인터뷰한 건 이번이 처음. 그만큼 그의 출연은 그 자체로 음악팬들로부터 큰 관심을 모았다. 닐슨 코리아 집계 결과 그가 등장한 ‘뉴스룸’ 2부는 시청률 2.137%(전국 유료방송가구 기준)을 기록했다. ‘서태지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다.
불혹(40세)을 넘긴 덕일까. 서태지는 여유가 넘쳤다. 손 앵커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안 변한 것 같다”고 덕담하자 서태지는 “그건 제가 여쭤보고 싶었던 말”이라며 “동안을 어떻게 유지하는지 비법을 알 수 있나”라고 물었다. 서태지 못지않게 ‘최강 동안’을 자랑하는 손 앵커의 나이는 58세. 손 앵커가 웃으며 “인터뷰는 오늘 제가 하기로 돼 있다”고 하자 서태지는 “한 번만 제가 여쭤볼 수 있나. 제 팬들이 너무 궁금해 했다”고 동안 비결을 재차 궁금해 했다. 손 앵커는 “특별한 방법은 없다. 아마 서태지씨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며 집요한(?) 질문을 에둘러댔다. 서태지는 웃으며 “맞다”고 했다.
서태지가 여유 있게 인터뷰에 응하는 모습은 손 앵커에게도 뜻밖이었나 보다. 손 앵커는 “스태프진이 조금 걱정하더라. ‘혹시 말이 짧으면 어떡하나’라고 걱정하던데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라고 했다. 서태지는 “저를 인터뷰하면 ‘마가 뜬다’고 하지 않나. 그런 게 많을 수도 있으니 이해해달라”고 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이 늦어질 수 있으니 양해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기우였다. 서태지는 달변이었다. 게다가 겸손했다.
손 앵커가 “지난 18일 공연 때 2만5,000여명이 모였다고 들었다. 생각보다 적게 왔나, 많이 왔나”라고 묻자 서태지는 “(생각보다) 많이 오셨다”고 했다. 손 앵커가 “겸손 아닌가”라고 묻자 서태지는 “아니다. 8집 할 때만 해도 1만 5,000~2만명 정도가 맥시멈이었는데 이번에는 더 조금 올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팬들 보고 너무 뭉클했다. ‘그 자리에서 계속 지켜봐주는 팬들이 있구나’라는 안도의 한숨도 쉬었다”고 했다.
이어지는 서태지 발언은 뜻밖이었다. 그는 “제 생각엔 (팬이 많이 온 건) 아이유씨 덕이었다. 아이유씨가 10대 팬들한테 음악(‘소격동’)을 많이 어필해줘서 신생 팬이나 젊은 팬도 많이 보였다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자기 콘서트가 흥행한 걸 스물한 살이나 어린 후배 가수의 공으로 돌릴 줄 아는 마음씀씀이에서 묵직한 겸손이 느껴졌다.
손 앵커가 “(가요 프로그램) 1위가 아이유씨 버전이어서 서운하진 않은가”라고 묻자 서태지는 “서운할 리가. 어쨌든 제가 만든 노래고 아이유씨 목소리가 너무 좋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서태지는 손 앵커가 “일각에서는 ‘(서태지가 아이유한테) 얹혀갔다’는 표현도 하던데”라고 하자 “업혀갔다. 맞는 표현인 것 같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서태지의 어른스러움이 극명하게 드러난 건 다음 답변에서였다. 손 앵커가 “서태지의 시대는 90년대에 끝났다. 명백한 사실이다. 2000년대 들어서 컴백했지만 그때부터 대중적인 음악은 분명히 아니었고 매니악한 음악이었다”라는 서태지의 이날 기자회견 발언을 언급한 뒤 “솔직한 심정인 것 같다”고 하자 서태지는 선선하게 “그렇다”고 인정했다.
손 앵커는 “이런 얘기를 할 때는 뭔가 좀 씁쓸하진 않나”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태지는 “‘씁쓸한 시간은 오래전에 지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지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편하게 음악을 하고 싶다. 제가 만든 ‘90's 아이콘’이라는 노래에도 고스란히 그런 얘기들이 담겨 있다. 우리가 30, 40대가 되면서 주류에서 자연스럽게 밀려나고 비주류가 돼가는 과정들을 스스로 이해하고 인정한다면 좋지 않을까. 나도 그런 과정을 통해 9집을 완성했다”고 했다. ‘내가 주류가 아니어도 좋다’는 젊은 거장의 넉넉한 마음가짐이 엿보였다.
항상 시대의 분위기를 담는 노래를 내놓은 만큼 서태지의 날이 무뎌진 건 아니었다. 손 앵커가 “‘크리스말로윈’ 노래의 산타는 뭘 상징하나”라고 묻자 서태지는 “나쁜 권력자나 교활한 권력자를 상징한다”고 했다. “‘울면 안 돼’라는 캐럴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들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울면 안 돼. 산타는 우는 아이들을 매일 두 번씩 리스트업해. 그리고 선물을 안 줘’라는 가사 내용이 너무 무서웠어요. ‘아이들이 슬프면 울어야 하는데 우는 걸 어떤 권력이나 공포로서 제압하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인가’ ‘산타는 좋은 사람일까’라고 생각해 동화 이야기처럼 은유적으로 푼 노래예요. 어떤 사람들은 산타를 권력자로 생각할 수도 있고, 교활한 직장상사로 생각할 수도 있어요.”
손 앵커가 “사회비판, 정부비판이라는 포괄적인 해석도 있지만 복지정책, 세월호 논란을 녹여냈다는 구체적인 분석도 있다”라고 하자 “아무래도 ‘요람부터 무덤까지’라는 가사, 그리고 ‘정책’ 얘기가 (노래에) 나왔을 때 그렇게 느끼는 분이 많은 것 같다”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리스너들의 판단”이라고 했다. 에두르긴 했지만 복지정책이나 세월호 사고를 노래에 담았다고 인정한 셈이다. 서태지는 “선과 악으로 보통 규정되는 통념을 뒤집어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 번 생각했으면 한다”라고 설명했다. 특유의 통찰력 빛나는 가사가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 발언이었다.
서태지는 최근 조용필을 만나서 소름이 돋을 정도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최근 조용필 선배님을 뵀는데 기억나는 게 있어요. 조용필 선배님은 공연을 위해 브로드웨이 같은 곳에서 뮤지컬 같은 걸 많이 보신대요. 어떤 뮤지컬은 열두 번 정도 보셨대요. 한 번은 무대만 봤고 한 번은 조명만 봤고 한 번은 음향만 봤고 이렇게 열두 번을 보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약간 소름이 돋았어요. ‘나는 너무 게을렀구나’라는 큰 배움, 깨달음을 얻었어요.”
서태지는 스스럼없이 자신감이 떨어지고 있다고도 얘기했다. 손 앵커가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나”라고 묻자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을 혹시 해쳐서 실망을 주면 어떻게 할까’라는 걱정이 제일 큰 걸림돌이었다. 그걸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것 같다. 자신감이 떨어진다. 나이가 먹을수록 더 못할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갈 때쯤 서태지는 느닷없이 손 앵커와 밤새도록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 손 앵커가 “(인터뷰를) 마친다고 하니까 혹시 서운하지 않은가”라고 묻자 “서운하다. 저는 밤새도록 얘기하고 싶다”면서 “손석희 앵커님 팬이기도 하고 예전부터 너무 좋아했다. 실제로 JTBC 뉴스 보면서 희망도 얻고 위로도 얻고 그랬다”고 말했다. 진심이 담긴 서태지의 표정은 진지했다. 쑥스러운지 손 앵커 낯빛이 빨개졌다.
이날 생방송 인터뷰는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단연 화제였다. “악플러들이 아무렇게나 이야기할 만큼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닌 것 같다” “정말 진솔했다. 서태지를 다시 봤다” “예의 바르고 멋지더라” “모범답안 같은 인터뷰” 등의 호의적인 반응이 잇따라 올라왔다.
“기품이 느껴졌다”는 극찬도 나왔다. 한 네티즌은 “본질에 충실한 분 같다. 일상생활에서 받은 이런저런 평가에 힘들어한 제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라고 말하며 서태지의 인터뷰를 보며 자신을 반성했다고 했다. ‘신비주의의 대명사’인 서태지에게서 주위의 비판마저 포용할 수 있는 어른스러운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는 건 이날 인터뷰가 거둔 최대 수확이었다. 그 정도로 이날 서태지가 보여준 모습은 ‘진짜 어른’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일부 안티팬은 여전히 그를 ‘네버랜드에 사는 키덜트’로 생각할 테지만 이런 편견마저도 포용할 정도로 서태지는 이미 성숙해 있었다.
천선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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