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묘미는 역설입니다. 성경에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마태복음 20장 26~28절)는 구절이 있습니다. 배재학당 교훈입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새겨야 할 말입니다. 뒤집어 해석하면 남을 지배하려 하는 자는 소인배라는 얘깁니다.
개가 시끄럽게 짖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진짜 무서운 개는 좀처럼 짖지 않습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한 척하는 사람이 사실은 약한 사람입니다.
6월25일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분노의 감정을 원색적으로 드러냈을 때 저는 박근혜 정권이 이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예감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나중에 텔레비전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소리를 지르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창피하게 생각했을까요?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무기력 들켜버린 강성발언…쇠락의 길 접어든 정권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지난달 29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평택상공회의소에서 현장최고위원회의를 한 뒤 제2연평해전 기념식장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 넥타이를 매고 있다. 평택/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박근혜 대통령의 힘이 정말로 강력했다면 그런 흉한 모습을 국민들 앞에 드러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짜로 힘이 있었다면 유승민 원내대표가 아예 당선되지 못하도록 했거나 조용히 알아서 물러나도록 했을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서슬퍼런 국무회의 발언 나흘 뒤 새누리당 재선 의원 20명이 성명서를 냈습니다. ‘최고위원회 논의 과정에 앞서’라는 제목입니다.
“원내대표는 당헌에 따라 의원총회를 통해 선출되었고, 최근 당·청 갈등 해소에 대한 약속도 있었다. 이런 민주적 절차를 통해 결정된 것을 의원들의 총의를 묻지 않은 채 최고위원회가 일방적으로 결정해서는 안된다.”
“헌법과 법률, 새누리당 당헌에 나와 있듯 의회민주주의와 정당민주주의는 우리가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이다. 금일 최고위원회 논의 과정에서 우리가 지키고 키워왔던 의회민주주의와 당내민주주의는 결코 훼손되어서는 안된다. 특히, 당내 화합에 힘써야 할 최고위원회가 당내 분란의 빌미를 주어서는 더욱 안된다.”
저는 사실 깜짝 놀랐습니다. 성명서의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새누리당에서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는 이런 성명을 낸 것 자체가 너무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새누리당은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의 후신입니다. 지시와 복종만 있을 뿐 아래에서 위를 들이받는 행동은 불가능하다고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20명 명단을 살펴보았습니다.
강석호, 권성동, 김성태, 김세연, 김영우, 김용태, 김학용, 나성린, 박민식, 박상은, 신성범, 안효대, 여상규, 이한성, 정문헌, 정미경, 조해진, 한기호, 홍일표, 황영철.
새누리 의원들, 더는 대통령을 두려워하지 않아
‘친박’이 아니라는 공통점만 있을 뿐 그리 유별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더 놀랐습니다. 제가 새누리당에 대해 아무래도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성명서 사건으로 새누리당 의원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입증됐습니다.
하긴 가만히 따져보면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은 새누리당의 ‘주류’가 아닙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승리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인적, 물적 역량에서 이명박 쪽이 박근혜 쪽을 앞섰던 것이 사실입니다. 보수 성향 언론사의 사주들도 박근혜가 아니라 이명박을 도왔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까지도 보수 언론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권 내부의 이런 권력 지형은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국회의장 후보 경선에서 비박의 정의화 의원이 친박의 황우여 의원을 꺾었고, 전당대회에서 비박의 김무성 의원이 친박 서청원 의원을 꺾었습니다. 올해에도 원내대표 경선에서 비박의 유승민 의원이 친박 이주영 의원을 꺾었습니다. 청와대의 주인은 박근혜 대통령이지만, 국회와 새누리당은 비박세력이 차례차례 접수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선 이후 ‘비박’은 ‘친박’에 져본 적 없어
심지어 최근 보수 성향 언론사의 논조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매우 비판적입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는 사설과 칼럼 등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에게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거부권 행사 이후에도 유승민 원내대표보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 양상훈 논설주간은 ‘여왕과 공화국의 불화’라는 칼럼을 썼습니다. <동아일보> 김순덕 논설실장은 ‘이병기 실장, 안된다 말하고 사표내시라’는 칼럼을 썼습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2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김태호 최고위원(왼쪽)이 유승민 원내대표(왼쪽 둘째)의 사퇴를 촉구한 뒤 재차 또 발언을 하려하자 제지하다 듣지 않자 회의 종료를 선언하며 자리에서 일어서 회의장을 나가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박근혜 대통령은 유승민 원내대표를 기어이 쫓아내려 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런 억지는 여권 내부의 권력지형, 보수세력 전체의 기류와 배치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매우 위험합니다. 솥에서 물이 끓을 때는 뚜껑을 열어야 합니다. 억지로 뚜껑을 누르면 솥이 깨질 수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고집을 부리면서 여러가지 파행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청와대의 거부로 당정협의가 중단된 상태입니다. 당정협의가 없으면 국정이 원활하게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둘째, 여야 합의로 2일 열릴 예정이었던 국회 운영위원회가 취소됐습니다. 청와대의 요청을 김무성 대표가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야당이 반발하자 운영위원회를 3일에 하기로 뒤늦게 합의했지만 어쨌든 청와대가 공공연하게 국회를 무시하는 장면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에서 드디어 사고가 터졌습니다. 김태호 최고위원과 원유철 정책위의장이 유승민 원내대표 거취를 놓고 싸우자 김무성 대표가 회의를 중단하고 퇴장했습니다. 대표 비서실장 김학용 의원은 김태호 의원을 겨냥해 상소리를 뱉었습니다. 집권여당 최고위원회가 양아치들의 뒷골목 싸움판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넷째, 오는 6일 새누리당 의원들은 국회법 개정안 재의 표결이 시작되면 집단으로 퇴장하는 등 표결에 불참할 것입니다. 본회의장 퇴장이나 의사일정 거부는 야당이 하는 것인데 이번에는 집권여당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됐습니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벌써부터 창피하다고 한숨을 쉬고 있습니다.
대통령과 원내대표 싸움…베테랑 기자도 처음 겪는 사태
앞으로 정국을 예측해 보겠습니다. 정국 전망은 정치부 기자들이 늘상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전례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집권여당 원내대표와 싸운 적이 없습니다. 청와대 비서실장, 정무수석 등 대통령의 정치참모들이 지금처럼 무기력한 적도 없었습니다. 이럴 때는 정치부 기자를 오래한 경험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거의 취재 경험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승민 원내대표가 물러난다면 친박계는 이주영 의원을 ‘추대’ 형식으로 다음 원내대표로 밀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되더라도 내년 총선에는 악재가 될 뿐이다. 사진은 지난 2월2일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 원내대표로 당선된 유승민 의원과 패배한 이주영 의원이 서로 껴안는 모습. 공동취재사진
정국의 최초 분수령은 6일 본회의 직후입니다. 유승민 원내대표가 사퇴하느냐, 사퇴하지 않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지게 됩니다. 지금 친박 의원들은 물론이고 김무성 대표도 유승민 원내대표가 국회법 개정안 재의 부결이나 실패에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명예로운 퇴진’이라는 말도 만들어냈습니다.
유승민 원내대표가 물러나면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새로 선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부터 복잡해집니다. 다음 원내대표는 누가 될까요? 일단 유승민 원내대표에게 패했던 이주영 의원이 유력할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나 친박들은 경선을 할 경우 위험하다고 보고 ‘추대’로 분위기를 몰아가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주영 의원이 원내대표가 되면 새누리당은 ‘청와대 여의도출장소’로 전락하고 박근혜 대통령과 행정부에 질질 끌려다니게 됩니다. 그 대가는 내년 총선에서 치르게 될 것입니다. 당장의 위기는 모면하더라도 나중에 한꺼번에 크게 망한다는 얘깁니다.
새누리당 비박 의원 중에서 누군가 이주영 의원에게 도전장을 낼 가능성도 물론 있습니다. 도전자가 원내대표에 당선되면 박근혜 대통령은 크게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6일 본회의 직후 유승민 원내대표가 물러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7월중 추가경정예산안 처리’는 명분으로 당분간 버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 친박 의원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유승민 원내대표를 쫓아내기 위한 무력시위가 대대적으로 벌어질 것입니다. 집권세력 내부의 갈등이 이 수준까지 증폭되면 새누리당은 물론이고 박근혜 정권 자체가 기울기 시작했다고 봐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선출직인 서청원 김태호 이인제 최고위원을 사퇴시킴으로써 김무성 대표 체제를 무너뜨리는 방법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그런데 새로 전당대회를 치르면 서청원 최고위원이나 다른 친박 인사가 과연 대표직을 차지할 수 있을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비박 인사가 새누리당 대표에 또다시 당선되면 박근혜 대통령은 곧바로 레임덕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승민이 사퇴하든 안 하든 정권은 망한다
결국 어느 길로 가더라도 박근혜 정권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박근혜 정권의 파국을 막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생각을 바꿔 유승민 원내대표의 손을 잡는 길입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정치인으로서 대승적 결단을 내리면 모든 문제가 일거에 해결됩니다. 대통령의 지지기반은 다시 강화되고 행정부와 새누리당은 국정을 이끌어갈 동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야당도 박수를 칠 것입니다. 가능할까요? 박근혜 대통령의 성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박근혜 대통령은 어쩌다가 정권 쇠락의 길을 자초하게 된 것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화를 참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국회법 개정안은 그냥 거부권을 행사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대통령으로서 ‘이의’가 있다고 밝히고 국회로 법안을 조용히 돌려보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유승민 원내대표를 쫓아내려고 달려들면서 스텝이 얽히고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남은 궁금증은 한 가지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과연 탈당할까요? 탈당한다면 언제 할까요? 청와대 관계자는 탈당설을 ‘소설’이라고 했습니다. 그럴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새누리당을 자신의 정당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정당의 국회의원들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판단하면 미련없이 당을 떠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공주는 비련(悲戀)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차하면 더이상 공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누리 의원들의 한가닥 남은 바람은 ‘타협’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지역구인 대구 동구 용계동 일대에 지난달 29일 유 원내대표를 비난하면서 사퇴를 요구하는 현수막들이 10여개 걸렸다. 대구/김일우 기자 cooly@hani.co.kr
최근 상황에 누구보다 속이 타는 것은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일 것입니다. 영남 지역구 의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재선 의원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뽑은 원내대표를 대통령이 물러나라고 요구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역구 민심은 대통령은 불쌍하고 국회의원은 나쁜 놈들이라는 것이다. 국민들의 생각이 옳지는 않지만 정치에서는 또 그게 현실이다. 타협해야 한다.”
“옛날 어른들은 부부싸움을 할 때 아이들을 다 내보냈다. 대통령과 여당의 갈등을 온 국민 앞에 드러내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조용히 풀어야 한다. 김무성 대표에게 역할을 줘야 한다.”
이 재선 의원의 말이 지금 새누리당 의원들의 평균적 생각일 것 같습니다. 새누리당 의원들의 염원은 이루어질까요? 어렵겠죠?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