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권을 탄핵으로 이끈 ‘결정적 4장면’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입력 : 2016.11.26 15:09:03 수정 : 2016.11.26 16:46:47
박근혜 정권을 탄핵으로 이끈 ‘결정적 4장면’
“이제야 사건이 불거진 게 신기할 따름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바라보는 한 정부 관계자의 탄식이다. 실제로 그렇다. 박근혜 정권을 복기해보면 이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박 대통령 취임식에 등장한 ‘해괴한 오방낭’을 시작으로, ‘혼’와 ‘우주’를 강조하는 이상한 수사를 구사하는 대통령, 아무리 봐도 ‘자격’이 안 되는데도 속속 요직을 꿰차는 사람들, 툭하면 청와대로 불려간 뒤 뭉칫돈을 내놓는 기업들, 세월호 사건 당시 사라진 대통령의 ‘7시간’ 등 진작 문제가 됐어야 하는 일들이 수두룩하다.
문제제기가 없던 건 아니다. 2014년에는 언론을 통해 사실상 ‘최순실 문건’인 셈이었던 ‘정윤회 문건’이 공개됐지만, 검찰은 엉터리 수사 끝에 ‘사실무근’으로 결론을 내렸다. 세월호 유족과 특조위는 의혹의 ‘7시간’에 대해 줄기차게 진상규명을 요청했지만 끝내 묵살당했다. 상식 밖의 ‘통치행위’를 온몸으로 겪어온 공무원들은 철밥통을 지키느라 정권 내내 모두 입을 다물었다.
내년 대선정국까지 1년여만 버티면 진실은 영원히 묻힐 수 있었다. 하지만 ‘최순실’이라는 이름 석 자가 등장한 뒤 모든 게 변했다. 4년 가까이 철옹성 같던 박근혜 정권은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의혹이 처음 불거진 지난 7월을 기준으로 하면 넉 달 만에, 최순실 관련 의혹이 본격 등장한 9월을 기준으로 하면 단 두 달 만에 무너질 처지에 놓였다. 박 대통령은 자신을 게이트의 공범으로 적시한 검찰 수사를 놓고 ‘사상누각’이라 비판했지만, 한줌 바람에도 날아갈 ‘권력의 모래성’을 쌓은 건 정작 본인 자신이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막이 오른 뒤 숨가빴던 지난 넉 달의 기간 중 박 대통령을 탄핵으로 이끈 결정적인 ‘4개의 팩트’를 언론 보도와 검찰의 공소장을 중심으로 되짚어본다.
이 때문에 TV조선이 7월 26일 ‘미르재단 기금 모금 과정에 청와대 안종범 경제수석이 개입한 의혹이 있다’고 처음 의혹을 제기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하는 시각이 많았다. 이튿날 더불어민주당은 “미르재단 설립은 권력을 이용한 차떼기 모금”이라며 공세에 나섰다.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대기업들로부터 823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거둬 트럭으로 실어나른 일명 ‘차떼기 사건’에 미르재단을 비유한 것이다. 청와대는 즉각 “전혀 관련 없는 일”이라며 부인했다.
TV조선은 8월 초까지 미르재단 설립에 차은택씨가 개입한 정황과 미르·K스포츠재단의 정관과 회의록이 조작된 의혹 등을 잇달아 제기했다. 하지만 모금과정에서 구체적인 불법행위가 확인되지 않았고, 설립 초기였던 재단들도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던 탓에 문제가 될 만한 돈의 흐름도 포착되지 않았다. 재단 의혹이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설왕설래하는 사이 세간의 관심은 9월부터 시행될 ‘김영란법’과 당시 이슈였던 대우조선해양 비리 문제 등에 더 쏠려 있었다.
이러던 중 대표적인 친박인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은 8월 29일 “<조선일보> 송희영 주필이 대우조선해양으로부터 외유성 접대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송 주필은 곧바로 사임했고, <조선일보>는 사과문을 게재했다. 이후 TV조선과 <조선일보>에서 미르·K스포츠 관련 보도는 자취를 감췄다. 언론계 등에서 “<조선일보>가 ‘꼬리’를 내렸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추석 연휴를 목전에 둔 9월 12일 경북 경주시에서 진도 5.8의 강진이 발생하자 온 이목이 지진에 쏠리며 재단 의혹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후 검찰 수사를 통해 TV조선이 제기한 의혹들은 대부분 사실로 확인됐다. 검찰은 최순실씨 공소장에서 안 수석이 박 대통령 지시로 대기업들로부터 기금을 강제모금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두 재단의 창립총회 회의록이 날조됐고, 문화체육관광부는 두 재단의 설립 신청 서류가 법적인 기준에 미달했음에도 하루 만에 재단 설립 허가를 내준 사실도 밝혀냈다. 결과적으로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 의혹이 제기되면서 나라 전체를 뒤흔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셈이다.
박근혜 정권 권력지도에 ‘최순실’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건 2015년 1월이다. 2014년 11월 말 <세계일보>는 이른바 ‘정윤회 문건’을 입수해 박 대통령을 둘러싼 비선세력의 국정농단 의혹을 제기한다. 당시 보도는 큰 파문을 일으켰지만 검찰은 수사를 통해 ‘사실무근’으로 결론내리고 오히려 문건을 청와대에서 유출한 혐의로 박관천 경정 등을 잡아들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최순실씨의 이름은 검찰 수사 과정에서 등장했다. 박 경정은 검찰에서 “대한민국 권력서열 1위는 최순실, 2위는 정윤회, 3위가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최순실씨의 존재가 사실로 확인되면서 미르·K스포츠재단 문제는 권력형 비리 의혹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과 고 최태민 목사, 최순실씨의 오랜 인연 관계는 이미 널리 알려진 터였다. 최순실씨의 등장 후 의혹의 화살은 박근혜 대통령을 향했다. 야권은 특검을 거론하며 공세 수위를 높여갔고, 청와대는 “근거 없는 의혹제기”라며 버티기에 나섰다.
점화된 게이트의 ‘땔감’이 된 건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다. <경향신문>은 9월 23일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의원의 자료를 근거로 정유라씨가 독일 마장마술대회에 출전해 타고다닌 말 ‘비타나V’가 삼성의 지원으로 구매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어 같은 달 27일부터는 언론 보도를 통해 정유라씨의 이화여대 출석 편의 문제 및 특례입학 의혹이 잇달아 제기됐다. 정유라씨가 대회 출전 등을 이유로 학교를 사실상 다니지 않았음에도 출석을 인정받았고, 입학 직전에는 이화여대에 존재하지 않던 승마 체육특기자 전형이 급히 신설된 사실도 드러났다. 정유라씨 특례입학 의혹은 대학생부터 10대 청소년들까지 게이트에 관심을 갖게 만든 결정적인 촉매로 작용했다. 투기자본감시센터는 29일 안종범 수석과 최순실씨 등을 뇌물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한다.
게이트가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새누리당이 나섰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9월 26일부터 정세균 국회의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느닷없이 단식에 들어갔다. 단식을 계기로 국회가 마비되고 여야 공방이 가열되면서 10월 들어 게이트보다는 정치권에 이목이 더 쏠렸다. 이 대표는 10월 2일 단식을 중단했다.
게이트에 다시 ‘군불’을 지핀 건 현 정부 들어 ‘문화계 황태자’로 불리던 차은택씨였다. 10월 4일부터 국정감사와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차은택씨가 밀라노 엑스포와 대통령 해외순방 관련 문화행사 등에서 각종 이권을 챙겼다는 의혹이 잇달아 제기됐다. 10월 6일에는 <한겨레>가 미르재단 사무실 임대차계약 당사자가 차은택씨의 측근이라는 사실도 공개했다. 평소 최순실씨와 가까운 사이로 알려졌던 차은택씨도 게이트의 ‘주역’임이 밝혀진 것이다.
정치권 내 공방은 격화됐다. 야당은 10월 11일부터 국정감사 등을 통해 정유라씨가 이대에서 지도교수 교체, 학점 특혜 등 각종 학사 편의를 받아온 사실을 공개하며 청와대를 압박했다. 새누리당이 꺼내든 반격 카드는 ‘색깔론’이었다. 때마침 발간된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의 내용을 들어 14일부터 노무현 정권과 문재인 전 더민주 대표에 대한 색깔 공세에 나섰다.
색깔론은 여전히 유효했다. 보수언론까지 회고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전세’는 역전되는 듯 보였다. 이때 머나 먼 이국땅 독일에서 최순실씨의 ‘꼬리’가 잡힌다.
<경향신문>은 18일 최순실씨 소유 독일 현지 회사 ‘비덱스포츠’가 K스포츠재단을 통해 모 대기업으로부터 80억원을 추가로 뜯어내려 한 사실을 폭로했다. 비덱스포츠는 정유라씨의 독일 현지 승마코치인 크리스티앙 캄플라데가 대표로 돼 있는 유한책임회사다. <경향신문>은 이 회사의 주주명부를 뒤져 최순실씨의 개명 후 이름인 ‘최서원’씨와 정유라씨가 공동 소유주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의혹’으로만 떠돌던 최순실씨의 존재가 ‘실체’로 처음 확인된 순간이었다.
이 보도로 최순실씨가 실소유주인 국내 스포츠 컨설팅 업체 ‘더블루K’의 존재도 확인된다. 19일 <경향신문>, <한겨레>, JTBC 등의 추가보도로 최순실씨가 더블루K를 통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을 배후조종한 사실도 확인됐다. 최순실씨가 비덱스포츠를 앞세워 독일 현지에서 호텔을 구매한 사실도 드러났다. 이에 호텔 구매자금 등을 놓고 외화반출 의혹 등이 제기되면서 청와대도 검찰도 더 이상 게이트를 방관할 수만은 없게 됐다.
여론이 들끓고 정치권의 해명 요청이 거세지자 박근혜 대통령은 20일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어느 누구라도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면 엄정히 처벌받을 것”이라며 수사 강화 지시를 내렸다. 검찰은 21일부터 수사에 투입되는 검사를 기존 3명에서 5명, 7명 순으로 늘리고 본격 수사 확대에 나선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근혜 대통령은 “의미있는 사업에 근거 없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검찰의 칼 끝이 설마 본인을 향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JTBC는 10월 24일 최순실씨가 소유했거나, 최소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태블릿PC를 입수해 “최순실씨가 박근혜 대통령 취임을 전후로 연설문과 각종 인사자료, 외교현안 자료 등을 사전에 보고받았다”고 보도했다. 2012년 개통돼 2014년 3월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태블릿PC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후보 시절 관련 문서부터 청와대 문서까지 전체 200여개의 파일이 담겨 있었다. 최순실씨와 박근혜 대통령의 연결고리가 완벽히 증명된 것이다.
이튿날인 25일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통해 “일부 연설문과 홍보 등을 최순실씨에게 도움 받았다”고 해명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뒤였다. 검찰은 27일 게이트 사건에 특수수사본부를 설치한 뒤 29일에는 청와대 압수수색을 시도하는 등 박근혜 대통령을 ‘정조준’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는 1차 촛불집회가 열려 2만명이 참여한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을 성토했다.
30일 새벽 영국에서 귀국한 최순실씨는 하루 뒤인 31일 검찰에 체포된 뒤 11월 3일 구속됐다. TV조선, 채널A 등 정권 내내 박근혜 대통령을 옹호했던 보수언론들도 최순실씨가 운영한 박근혜 대통령 전용 의상실 관련 보도 등을 쏟아내며 완전히 등을 돌렸다.
11월 4일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5%를 기록하며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같은 날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며 사죄했지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고삐가 풀린’ 검찰은 안종범 수석과 정호성 비서관을 6일 구속한 데 이어, 11일에는 차은택씨까지 주요 핵심 인물들을 모두 구속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숨통을 조여갔다. 11월 12일에 열린 3차 촛불집회에는 100만명이 참여해 한목소리로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다.
주요 인물들에 대한 구속수사를 통해 검찰은 박근혜 대통령이 게이트에 깊숙이 관여한 사실을 확인했다. 11월 20일 작성한 최순실씨 공소장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을 사건의 ‘공범’으로 적시했다. 지난 4일 대국민 담화에서 검찰 수사 협조를 약속한 박근혜 대통령은 21일 곧바로 변호사를 통해 “검찰 수사가 불공정해 못 받겠다”고 말을 뒤집었다. 대통령의 ‘식언’을 지켜본 새누리당 내에서는 비박계 의원들의 탈당 러시가 시작됐고, 청와대와 내각에선 최재경 민정수석과 김현웅 법무부 장관이 사표를 던졌다. 본격적인 정권 붕괴의 신호탄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이제 ‘탄핵’이라는 결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친박계인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이 “바람 불면 꺼질 것”이라고 조롱한 촛불집회는 26일 최대 200만명이 참여해 헌정사상 최대 규모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