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판사도 다 똑같은 놈들”…사법부까지 ‘종북 딱지’

등록 : 2013.08.26 19:49 수정 : 2013.08.27 00:45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및 여론 조작을 지시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첫 공판이 2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렸다. 구속수감중인 원 전 원장의 모습은 이날 공개되지 않았다. 사진은 원 전 원장이 지난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위 청문회’에 출석하기 위해 국회에 도착해 법무부 호송 차량에서 내리는 모습이다. 뉴스1

검찰이 밝힌 ‘신종 매카시즘’ 행태

2010년 6월 지방선거 앞두고
야권 후보 당선 막을 목적
“그땐 판사들 아마 적이 돼서
사법처리를 하지 않을 거야”

검찰 “원 발언, 교지·강령 해당
심리전단 직원들에게 하달돼
야당 비판의견 유포로 나타나”

“그땐 판사도 아마 적이 돼서 사법처리를 하지 않을 거야. 다 똑같은 놈들일 텐데….”(2010년 1월22일 국가정보원 전 부서장 회의)

26일 원세훈(62) 전 국가정보원장의 첫 공판에서 검찰은 “구체적 근거 없이 무차별적으로 종북 딱지를 붙이는 신종 매카시즘의 행태를 보였다”고 원 전 원장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원 전 원장이 국정원 전 부서장 회의에서 사법부까지 ‘종북 세력’으로 의심하는 발언을 한 사실을 공개했다.

■ “오염된 국민, 국정원이 정화해야” 검찰은 국정원의 대선 여론조작 및 정치개입 사건이 정부 정책에 반대하면 무조건 종북 세력으로 보는 원 전 원장의 ‘그릇된 종북관’에서 비롯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2010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원 전 원장이 야권 후보들의 당선을 막으려는 취지에서 한 발언이 대표적이다. 2010년 1월22일 전 부서장 회의에서 원 전 원장은 “그땐 판사도 아마 적이 돼서 사법처리를 하지 않을 거야. 다 똑같은 놈들일 텐데…”라고 말했다. 야권 후보들이 다수 당선이 되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가 돼도 법원에서 당선무효형에 해당하는 선고가 쉽게 나지 않을 거라는 얘기다. 원 전 원장은 같은 해 4월16일 열린 전 부서장 회의에서 “북한 지령이 내려오는 것을 보면, 이번 지방선거에서 정권을 바꿀 수 있도록 (야권이) 다 모이라는 것인데 지령대로 움직이는 건 결국 종북단체 아니냐”고 했다.

검찰이 이날 밝힌 전 부서장 회의와 일일 아침브리핑 내용을 보면 원 전 원장의 매카시즘적 발언은 일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2012년 6월18일에는 “종북좌파들의 진보 정권 세우려는 시도를 저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검찰은 이를 명시적인 대선 개입 지시의 증거로 판단하고 있다. 또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 이아무개씨는 “종북 세력이 연말 대선을 앞두고 종북 정권을 수립하려는 야욕에 대처하라는 지시를 받은 바 있다. 이정희(당시 통합진보당 대선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종북 정권이 된다는 지시도 받았다”고 검찰 조사에서 진술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밖에도 원 전 원장은 “정부 여당에 대한 비방 및 북한의 인터넷 선동이 심각해지는데 개인 세력이 있다면 이는 우리 국민이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느새 인터넷이 종북좌파 텃밭이 됐다”, “오염된 국민의 생각을 국정원 사이버로 정화해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회의에서 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 원세훈 ‘총괄지휘자’…국민 상대 여론전 검찰은 원 전 원장의 이런 발언들이 사이버 분야를 담당하는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에게 일반적 명령인 ‘교지와 강령’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원 전 원장이 지휘계통을 밟아 지시를 내리면 내부 전산망인 인트라넷 등을 통해 심리전단 직원들에게 하달돼, 평소에는 정치에 관여하고 선거 때는 선거 이슈와 관련해 야당 및 시민단체에 반대하는 의견을 유포하는 활동으로 귀결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정원 직원 김하영(29)씨가 지난해 11월30일 ‘오늘의 유머’(오유) 게시판에 ‘해군기지 뭐 어쩌자는 거지?’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 대해 국정원 쪽은 북한의 대남 선전매체인 ‘구국전선’의 선전 선동에 대응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 이 글은 제주해군기지 건설 예산안 처리를 보류시킨 민주당을 비판한 것이라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또 지난해 11월 ‘오유’에 게재된 ‘목 내놓고 금강산 가기 싫다’는 제목의 글 역시 국정원 쪽은 북한의 대남 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가 “남북관광은 교류 협력과 통일의 지름길”이라고 선동한 데 대응한 것이라고 하지만, 바로 전날 문재인 당시 대통령 후보가 금강산 관광 공약을 발표한 것을 비판하기 위해 쓴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국정원은 ‘대북 심리전’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야당 비판과 정권 옹호’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검찰은 법정에서 “국정원이 적이 아닌 일반 국민을 상대로 여론·심리전을 벌였다”고 질타했다.

검찰은 국정원장을 정점으로 한 국정원의 ‘상명하복’ 지휘·통솔 체계에 따라 원 전 원장의 지시로 심리전단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 보고 있다. 검찰은 원 전 원장이 4대강 사업을 발목 잡는 야당과 좌파에 대한 대처를 지시했고, 4대강 이슈 논지를 전달받은 심리전단 직원들은 4대강 사업을 비판하는 주장을 강력히 공박하는 보고서를 작성해 원 전 원장에게 보고했다고 밝혔다. 또 2010년 1월22일 원 전 원장이 세종시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대응 필요성을 지적하자 6일 뒤인 28일 심리전단 직원이 “대한민국은 세종시라는 과거로부터 탈출해야”라는 글을 포털 다음 아고라에 작성한 사실도 드러났다.

박형철 서울중앙지검 공공형사수사부 부장검사는 이날 공판 모두(첫머리)진술에서 “원 전 원장은 국정원장의 지위를 이용해 심리전단 직원들에게 인터넷에서 여론조작을 하게 함으로써 정치 관여 및 18대 대선 선거운동을 했다. 일반 국민을 가장해 정치·선거와 관련한 여론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반헌법적 행태를 저질러 준엄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정필 기자 fermat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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