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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특별법 제정 촉구 범국민대회가 열린 19일 오후 광화문에서 유가족들이 단식을 벌이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
혼자 빠져나갈 것인가, 거짓과 은폐에 맞설 것인가
죽음의 명량이 이순신 장군에게 기회였듯이
아이들 수장한 맹골수도가 당신에게도 기회입니다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69
밀물이나 썰물일 때 해남 우수영과 진도 벽파진 사이를 흐르는 물살은 굉음을 울리며 지나가는 거대한 기관차 같습니다.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물살, 바다 속 펄까지 끌어올리며 토해내는 바다의 울음은 지옥도 그대로입니다. 잠깐 정신을 놓았다가는 물살에 휩쓸려 들어갈 것만 같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그 물살을 온몸으로 버티며 대장선 홀로 330척의 적함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뒤따라야 할 전함 11척은 물살로 들어오지 않고 주춤거리고 있습니다. 순류를 타고 밀려오는 적의 함대는 거대한 공포입니다. 한 사람이 버티고 있어도 천명이 통과하기 쉽지 않은 병목이긴 하지만, 홀로 맞선 한 척의 전함은 처절하게 고독합니다. 앞으로 가나 뒤로 물러서나 죽음뿐, 장군은 아예 닻까지 내리도록 했습니다. 그는 그 물살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저 원혼들을 어찌할 것인가.” “저 쌓인 원한을 어찌할 것인가.” 칠전량에서 왜군에 수장된 1만여명의 조선 수군과 백성들을 생각하며 하는 말이었습니다.
시대가 역류할 때마다 영화가 치유제로 등장하는 건 이제 습관처럼 되었습니다. 2013년 연말 ‘변호인’은 사람들 마음을 시리게 했고, 2013년 초 개봉된 ‘레미제라블’은 따듯한 인간의 노래로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었습니다. 지금은 ‘명량’(울돌목)이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개봉 첫날 관객 동원 최고 기록을 경신하더니, 4일째인 2일 역대 하루 최대 관객 기록을 갈아치웠고, 이제 최단 기간 300만 관객 돌파 기록도 남겼습니다.
관객들의 이런 관심은 절박함에서 나왔을 겁니다. “누가 이 나라, 이 국민을 지켜줄 것인가.” 조선조 양대 왜란 때 상황이나 다름없는 정치, 온갖 곳에서 상상할 수 없는 엽기적인 사건과 참사가 잇따르고, 위정자 중에는 책임지는 자 하나 없고 도망칠 궁리나 하고, 사대부 기득권 세력들은 변화를 거부하며 저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패륜이나 일삼고… 어디를 둘러보아도 의지할 곳, 살 만한 곳은 없어 보입니다. ‘대망론’은 거기서 싹텄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무릇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다하는 것이고, 충은 임금이 아니라 백성에게 향한 것’이라는 신념 아래, ‘더 이상 살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곳에 버티고 서서, 밀려오는 적들과 맞서 국민과 나라를 지키려 했습니다. 지금은 고삐 풀린 자본의 탐욕, 무능한 권력의 횡포와 야합 등 거악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민을 보호해주고, 역류를 순류로 바꿔줄, 그런 사람을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는 22일째 단식중인 세월호에 희생당한 유민이 아빠가 있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살려달라고 울부짖다 죽었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우리 아이들이 왜 그토록 억울하게 생매장 당했는지 밝혀내려면, 저라도 광화문을 지켜야 합니다.” 오로지 참사의 진실을 밝혀, 안전한 대한민국의 디딤돌을 만들고 싶어, 아들의 죽음 앞에서 저의 목숨까지 내건 유민이 아빠를 보며, 비록 구리 동상이지만 이순신 장군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권력이란 언제나 저렇게 그악스럽고, 백성은 그 횡포 아래서 언제나 신음해야 하는가?
임진왜란 7년 전쟁에서 나라를 지킨 이순신 장군이지만, 권력자들은 그에게 살이 터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문을 가하고 아예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정유재란, 다시 침략한 왜군 앞에서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리자 장군을 다시 전선으로 내보냅니다. 무능하면서 탐욕스럽고, 무책임하면서 포악하고, 무지하면서 교활한 자들이었고, 권력을 위해선 어떤 공작, 어떤 술책, 어떤 사기, 어떤 유착도 다 저지를 자들이었습니다. 전쟁에 앞서 스스로 나라를 무너지게 한 자들입니다. 유민이 아빠가 맞서고 있는 지금의 권력자들은 어떠할까요. 500여년 전 조선의 권력자와 다를 게 무엇일까요.
지난해 여름엔 태안 해병대 캠프에서 고교생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지난 겨울엔 경주에서 새내기 대학생들이 참변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올 봄엔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그 와중에 22사단 지오피에선 임 병장의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직후 같은 사단에서 신참 이등병이 자살을 했습니다. 그보다 앞서 28사단에선 윤 일병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달 두달 계속된 야만적인 집단 구타로 숨졌습니다.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선 장병을 군은 환자로 만들거나 주검으로 사회에 되돌려 보냈습니다. 전역 당일 집에서 자살한 이 상병도 있습니다.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은 대개 진상이 은폐됐습니다. 진상이 낱낱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책임 소재가 불분명합니다. 책임자들은 빠져나갔습니다. 사건의 진상이 없으니 제대로 된 대안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참변은 되풀이됐고, 이제 사람들은 이 나라를 떠나겠다거나, 자식을 군대 보내지 않겠다고 분노하게 됐습니다. 그 결정판이 세월호 참사였습니다.
그런데 권력자들이 한 짓이란 무엇입니까. 오로지 ‘진상 규명’과 ‘안전한 대한민국’을 요구해온 세월호 유족들을 터무니없이 많은 액수의 보상이나 배상을 바라며 떼를 쓴다고 거짓말을 늘어놨습니다. 이런 여론 조작이 먹혀 그들은 7·30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유족들은 ‘유족충’이란 소리까지 듣게 됐고, 일부 패륜아들은 ‘시체 장사꾼’으로 모욕을 주기도 했습니다.
권력자들도 사실 압니다. 유족들이 가족을 보내고, 아이의 원통한 죽음을 가슴에 묻고 나서 단 하루도 편히 쉬지 않고 거리에서, 바닷가에서, 관공서 처마 밑에서 간절하게 요청해온 건 참사의 진실, 진상 규명이란 걸 말입니다. 그러나 조선의 관리들이 오로지 당파적 이해 때문에 왜군의 침략 가능성을 왜곡했던 것처럼 이들은 유족들의 진심을 조작하고 왜곡하고, 유권자들이 희롱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선거가 끝나자 이번엔 그렇게 빈정대던 보상 배상 문제를 더 적극적으로 협의하겠다고 공언하고 나섰습니다. 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는 “재보선 전보다 전향적, 선제적인 입장을 갖고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김재원 원내수석부대표는 유족들이 요구해온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은 아예 거론도 않고, 야당이 백보 양보해 제시한 야당의 특검 추천 방안도 ‘검토할 가치조차 없다’고 차버렸습니다. 이들이 거들먹거리며 유족에게 내놓은 대안은, 돈입니다. 돈을 더 받을래 아니면 깡통 찰래?
하긴 세월호 참사를 단순 교통사고라고 떠들고, 유족들을 보상이나 더 타내려는 사람들로 매도하고,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단식하고 농성하는 것을 ‘노숙자’로 비유하는 사람들이니 무슨 말인들 못하겠습니까. 철도나 선박회사 등에서 뇌물성 정치자금을 빨아먹던 자들이 버티고 있는 정당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런 자들이 국민의 대표랍시고 군림하는 국회에서, 역시 20일째 단식중이던 예은이 아빠는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보상 충분히 해줄 테니 먹고 떨어지라는 뜻인가요” “이젠 아예 공개적으로 회유와 분열 공작을 해보시겠다, 정말 모욕적이고 참담하군요.”
그들은 하나같이 말합니다. 그것이 재보궐 선거에서 나타난 국민의 뜻이라고. 참으로 착잡합니다. 지난번 선거는 세월호 참사를 놓고 새누리당과 유족들이 승부를 겨룬 게 아니었습니다. 지난 선거는 무책임하고 교활한 여당이 아니라, 무능하고 우둔한 야당을 심판한 것이었습니다. 야당에 표를 던지지 않은 것이지 여당을 지지한 게 아닙니다. 유권자 열에 넷만이 투표하고, 그 중에 2명이 여당을 찍었습니다. 유권자 열명 가운데 단 두명만이 여당에 표를 준 것입니다. 그것을 두고 국민의 뜻 운운하고 있으니, 그 용기가 가상합니다.
승객 304명이 목숨을 잃은 세월호 참사는 사실상 배 주인이라는 유병언씨가 죽었다고, 그 일가가 모조리 구속되거나 쫓기고 있다고 끝난 게 아닙니다. 세월호 참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을 속이고 한강 다리 끊고 도망친 이래 권력층에 의해 저질러진 가장 무책임하고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대통령은 세월호 침몰 사고가 터져 참사로 악화되는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고, 청와대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던 이유를 알 수 없고, 해경은 구조는 않고 그저 배회했던 까닭을 알 수 없고, 국정원은 세월호와 무슨 관계인지 오리무중이고, 안전행정부와 해양수산부 등 모든 재난 관련 부처들이 엉망진창으로 허둥대거나 눈치만 봤던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세월호가 운항할 수 있도록 선령을 10년이나 늘린 이유를 알 수 없고, 선체의 증개축을 허가한 것이나 이후 두 번씩이나 안전검사를 통과시킨 배경을 알 수 없고, 과적이나 엉터리 고박 상태에서 배의 출항을 허가한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유병언씨를 잡으려 한 건지 죽이려 한 건지 아직도 알 수 없고, 사인도 모를 정도로 그의 시신이 방치됐던 이유도 알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진실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돈으로 봉해버리자고요?
고무통에 시신을 처박아둔 ‘포천 빌라 살인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습니까? 그렇게 돈 통에 박아 버리면 참사의 진실이 가려질까요. 진실을 돈으로 도배질하면 국가가 개조되는 겁니까?
솔직히 박근혜 대통령에겐 이제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새누리당도 당신의 홍위병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지난 선거에서 당신은 지워졌습니다. 김무성 대표가 엊그제 국방부 장관을 앉혀놓고 책상을 치며 폼 잡는 걸 보면 알아야 합니다. 당신의 내일은 당신 스스로 개척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난 1년 반 황금의 시간을 아무 것도 한 일 없이 허송했습니다. 아니, 참혹한 사건 사고들이 쏟아졌던 시기였습니다. 기회가 있다면 어쩌면 바로 그 세월호 참사일 겁니다. 죽음의 울돌목 물살이 이순신 장군에게 기회였듯이, 아이들을 수장한 맹골수도가 당신에게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유족과 국민을 속이는 짓을 멈추고,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결단을 해야 합니다. 유족들과 대한변협 그리고 시민사회의 요청대로 수사권과 기소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을 포함한 특별법 제정을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이를 통해 어떤 사건, 사고이건 그 진상을 낱낱이 밝혀 그 뿌리인 적폐를 발본하는 전통을 세워야 합니다. 재발을 예방할 수 있고,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월호 참사처럼 이 나라 권력자들의 무능·무책임 구조를 바로잡을 수 있고, 아무도 자식을 군대에 보내려 하지 않는 이 비정상적인 나라를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난리법석을 떨고 있는 ‘윤 일병 집단 폭행치사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동안 진상이 은폐됐을뿐 수도 없이 되풀이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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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 |
선택해야 합니다. 세월호 선장처럼 저 혼자 빠져나갈 것인가, 아니면 죽기를 각오하고 거짓과 은폐의 악습과 맞설 것인가, 택일해야 합니다. 달리 선택할 것도 없습니다. 도망치면 원균이나 세월호 선장 꼴이 될 것이고, 필사즉생의 각오로 세월호의 진실을 밝힌다면 그나마 떳떳한 대통령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맹골수로에서 울부짖는 원혼들의 아우성을 들으십시요. 그 쌓인 원한을 어찌하려 합니까.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