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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1967년 목포 선거는 내가 겪은 가장 험한 싸움”

등록 :2015-07-12 16:52수정 :2015-07-12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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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 이희호 평전]
제2부 만남과 동행-7회 목포의 전쟁 (상)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은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19번째 이야기다.

이 이사장이 걸어온 길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90여년에 걸쳐 있다. 이 일대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 대학 시절과 미국 유학, 사회운동 시절을 거쳐 정치인 김대중과 만난 뒤 현대사의 파란과 굴곡을 헤쳐 나오는 시기를 모두 아우를 예정이다. 그의 삶은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뜬 여성운동가의 삶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간난신고를 헤쳐 나온 종교인의 삶이었으며, 남편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의 삶이었다. 이 일대기는 매주 한번씩 진행하는 육성 인터뷰를 바탕으로 삼아 김대중평화센터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보관된 개인 문서와 구술 사료, 저서, 관련 책과 지인들의 증언을 참고해 집필한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1966년 9월22일 이희호는 국회에 있었다. 남편 김대중이 대정부 질문을 하는 날이었다. 이날 국회 본회의장에서 현대사의 악취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카린 밀수 사건’을 추궁하던 중 벌어진 일이었다.

사카린 밀수 사건은 정권과 재벌이 공모해 저지른 불법행위였다. 전말은 이랬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이 울산에 한국비료 공장을 지으면서 일본으로부터 4200만달러의 상업차관을 얻었다. 정부가 지불보증을 섰다. 일본 미쓰이물산은 차관을 공장 건설용 자재와 기계로 대신 제공하면서 리베이트로 100만달러를 삼성에 주었다. 현금 100만달러를 뒤탈 없이 가져올 방법이 없었다. 삼성은 이 돈으로 사카린 2259포대를 사서 백색 시멘트로 위장해 몰래 들여왔다. 또 에어컨·냉장고·전화기·양변기·욕조 같은 사치품도 함께 밀수했다. 시중에 내다 팔면 몇 배가 남는 것들이었다. 부산세관이 1966년 5월 사카린 밀수 사실을 적발했다. 묻힐 뻔했던 이 사건은 9월15일 신문에 보도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여론이 끓어올랐다.

9월22일 국회 본회의가 열렸다.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재벌의 밀수를 규탄했다. 공화당 의원 이만섭이 대정부 질문 첫 발언자로 나와 “이병철씨를 왜 구속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두번째로 단상에 오른 민중당 의원 김대중은 정부의 재벌 비호를 비판했다. “요즘 양담배 하나만 태워도 잡아가는 실정입니다. 5·16 직후에 밀수범들을 사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재벌이 거액의 밀수를 한 것은 어찌된 일인지 정부가 오히려 두둔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은 이병철 처벌과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다.

마지막으로 단상에 오른 사람은 야당 의원 김두한이었다. 김두한은 “배운 게 없어서 말은 잘할 줄 모르지만, 행동은 잘한다”고 하더니 가지고 온 통을 들고 국무위원석으로 다가갔다. 김두한은 “재벌 도둑질을 합리화시켜주는 내각을 규탄하는 국민의 사카린이올시다” 하며 통에 든 것을 뿌렸다. “똥이나 처먹어.” 국무총리 정일권을 비롯해 각 부처 장관들이 인분을 뒤집어썼다. 이희호도 현장을 목격했다. “국회 방청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공교롭게도 그날 김두한 의원이 국무위원들한테 인분을 뿌려대는 일이 일어났어요. 국회가 난장판이 되고…,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끔찍한 상황이었어요.”

1966년 9월22일 이희호는 국회 본회의장에 방청을 하러 갔다 역사적인 사건을 목격했다. 한창 정치쟁점이 된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두고 남편 김대중 의원의 ‘재벌 비호’ 비판 연설(위 사진)이 끝난 뒤 마지막으로 연단에 오른 야당의 김두한 의원이 정일권 국무총리(사진 왼쪽) 등 내각을 향해 ‘국민의 사카린’이라며 똥물을 뿌리는 장면(아래 사진)을 지켜봤다. <한겨레> 자료사진
1966년 9월22일 이희호는 국회 본회의장에 방청을 하러 갔다 역사적인 사건을 목격했다. 한창 정치쟁점이 된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두고 남편 김대중 의원의 ‘재벌 비호’ 비판 연설(위 사진)이 끝난 뒤 마지막으로 연단에 오른 야당의 김두한 의원이 정일권 국무총리(사진 왼쪽) 등 내각을 향해 ‘국민의 사카린’이라며 똥물을 뿌리는 장면(아래 사진)을 지켜봤다. <한겨레> 자료사진
삼성의 밀수에는 청와대도 깊숙이 관여돼 있었다. 사카린 밀수를 현장에서 지휘한 사람이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였는데, 이맹희는 뒷날 회고록에서 ‘밀수를 하자고 처음 제안한 사람이 박정희였다’는 이병철의 말을 전했다. 청와대와 삼성은 밀수로 번 돈의 일부를 정치자금으로 돌리자고 합의했다. 사건이 커지자 박정희는 “재벌 밀수는 반국가 행위”라고 비난했다. 이맹희는 ‘정치자금 마련이 밀수의 목적이었는데, 대통령이 모르는 척하기 시작했다’고 이병철이 느낀 배신감을 대신 밝혔다. 사카린 밀수는 박정희 정권의 정치자금 조달 방식이 얼핏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듬해 치러질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정권의 돈잔치가 될 것임을 예고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야당은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전열을 재정비했다. 윤보선은 민중당을 탈당한 뒤 1966년 신한당을 만들었다가 1967년 2월 민중당과 다시 합쳐 통합 야당 신민당을 창당했다. 앞서 민중당은 고려대 총장을 지낸 유진오를 영입해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으나, 신한당과 통합한 뒤 후보를 윤보선에게 양보했다. 유진오는 신민당 당수를 맡았다. 야당 세력 내부의 후보 단일화였다.

“탄압 무서워 도망칠수 없다”
김대중은 목포에 출마
상대는 육군소장 출신 김병삼

박정희는 맘이 안 놓였는지
중앙정보부에 김대중 낙선령
게다가 두번이나 지원유세
총리·장관 데려와 현지 국무회의
“아무런 규칙도 없는 토벌작전”
그 이면에는 3선개헌 그림자

김대중 큰길, 이희호는 골목길로
“저는 손을 잡아주기만 했어요”
갈수록 인기 치솟아
유세 뒤 사인 받으려는 인파
시장사람들 더 오지말래도
“오늘 안 벌어도 먹고살어라우”

1967년 5월3일 치러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와 윤보선은 다시 맞붙었다. 박정희는 관권을 총동원했다. 선거 결과는 예상대로 박정희의 승리였다. 박정희는 51.5%(568만표)를 얻었고, 윤보선은 40.9%(452만표)에 머물렀다. 박정희의 승부처는 영남이었다. 박정희는 서울·경기·충남·호남에서 졌지만 영남에서 226만표를 얻어 89만표에 그친 윤보선을 압도했다. 박정희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했다. 차관을 제공한 국제개발협회가 ‘국토 균형발전을 이루려면 경부고속도로와 같은 남북 종단 도로보다는 횡단 도로가 더 시급하다’고 했지만 박정희는 자기 뜻을 밀어붙였다. 박정희는 호남선 복선화도 선거 공약으로 발표했다. 호남선 복선화가 완료된 것은 첫 삽을 뜨고 36년이 지난 뒤인 2003년 12월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박정희는 여세를 몰아 제7대 국회의원 선거를 6월8일 치른다고 발표했다. 여당은 총력전을 준비했다. 야당도 더 밀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박정희는 6대 대통령으로 취임도 하기 전에 벌써 개헌을 생각하고 있었다. 대통령을 두번만 하고 그만둘 생각이 박정희에게는 없었다. 헌법을 고치자면 여당이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장악해야 했다. 자유당 시절의 부정선거 수법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김대중은 어디에 출마할지를 놓고 장고를 거듭했다. “남편은 목포에 출마하느냐 다른 선택을 하느냐 하는 문제로 한동안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부정선거를 하기 쉬운 지방 지역구는 위험하니 서울로 지역구를 옮기거나 아니면 다른 후보의 지원유세를 할 수 있는 비례대표를 하라는 당내 의견이 많았어요. 결국 목포에 출마하기로 했지요.” 김대중은 뒤에 선거연설에서 목포 출마를 결심한 이유를 설명했다. “목포에 가면 배겨나지 못할 것이니 선거구를 서울로 옮기거나 비례대표로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천번만번 생각해도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운다는 사람이 정부의 탄압이 무서워서 도망칠 수는 없었습니다.”

이희호는 제6대 국회의원 선거 때 임신과 출산으로 남편을 돕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목포로 갔다. “1967년 목포 선거는 내가 겪은 모든 선거 중에서 가장 힘들고 험한 선거였어요. 전쟁이라고 해야 할 만큼 치열했지요.” 이희호와 김대중은 목포역 앞 작은 일본식 가옥 2층에 선거사무소를 차렸다.

김대중의 상대는 육군 소장 출신 김병삼이었다. 5·16에 참여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초대 내각 사무처장을 거친 뒤 체신부 장관을 지낸 거물급이었다. 김병삼은 고향 진도에서 출마하고 싶어했으나 박정희의 지시로 어쩔 수 없이 목포를 선거구로 택했다. 김대중을 겨냥한 표적 공천이었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와 내무부 간부들을 청와대로 불러 무슨 일이 있어도 김대중을 떨어뜨리라고 영을 내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대중을 막을 수 있다면 여당 후보 열명이든 스무명이든 떨어져도 상관없다’고 했다는 말이 돌았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남편을 낙선시키려고 했지요.” 김대중은 6대 국회에서 박정희 정권을 번번이 궁지로 몰았다. 김대중을 그대로 두고는 앞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 뻔했다.

박정희는 지시만 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뛰었다. 지방순시라는 명목으로 전국을 돌던 박정희는 목포를 연거푸 두번이나 방문했다. 직전 대통령 선거 때는 아예 들르지도 않은 곳이었다. 박정희는 목포역 앞에서 여당 후보 지원유세를 했다. 박정희가 후보 지원유세를 한 곳은 목포가 유일했다. 박정희는 2만명의 청중을 모아놓고 “김병삼 후보가 당선되면 목포 경제를 살리고 대학도 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박정희의 목포에 대한 관심은 집요했다. 총리와 장관을 데리고 목포로 내려가 유달산 기슭의 호텔에서 목포 발전 방안을 안건으로 내걸고 국무회의를 열었다. 청와대를 목포로 옮겨놓은 듯했다. 경제기획원 장관 장기영은 목포에 공장을 수십곳 들이겠다고 발표했다. 공무원의 선거중립 규정을 대놓고 위반한 것이었으나 선거관리위원회는 대통령이 공화당 총재를 겸하므로 선거운동을 해도 된다고 발표했다. 국무회의 내용은 공화당 후보 김병삼이 경영하는 <호남매일신문>에 대서특필됐다. <호남매일신문>은 해방 직후 김대중이 경영했던 <목포일보>가 이름을 바꾼 신문이었다. 젊은 날 김대중이 아꼈던 그 신문이 김대중을 치고 있었다.

1967년 ‘5·3 대선’에서 관권 총동원으로 6대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곧바로 ‘3선 연임 작전’에 돌입했다. 개헌 의석 확보를 겨냥한 ‘6·8 총선’에서 김대중은 ‘걸림돌 1호’로 찍힌 까닭에 ‘목포 선거’는 박정희와 김대중의 첫 격돌이자 예비 대선전을 방불케 했다. 왼쪽 사진은 김대중 후보가 목포 역전 광장에서 유세 연설을 끝낸 뒤 몰려드는 지지자들에게 서명을 해주고 있는 모습, 오른쪽 사진은 총선 기간에 두 차례나 전남지역 시찰을 내려와 노골적인 관권선거운동을 한 박정희가 5월24일 목포 유권자들과 만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자료사진
1967년 ‘5·3 대선’에서 관권 총동원으로 6대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곧바로 ‘3선 연임 작전’에 돌입했다. 개헌 의석 확보를 겨냥한 ‘6·8 총선’에서 김대중은 ‘걸림돌 1호’로 찍힌 까닭에 ‘목포 선거’는 박정희와 김대중의 첫 격돌이자 예비 대선전을 방불케 했다. 왼쪽 사진은 김대중 후보가 목포 역전 광장에서 유세 연설을 끝낸 뒤 몰려드는 지지자들에게 서명을 해주고 있는 모습, 오른쪽 사진은 총선 기간에 두 차례나 전남지역 시찰을 내려와 노골적인 관권선거운동을 한 박정희가 5월24일 목포 유권자들과 만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자료사진

목포 총선은 김병삼을 대리인으로 내세운 박정희와 김대중의 싸움이었다. 신민당 당수 유진오는 김대중 지원유세를 하러 내려와 “목포는 선거가 아니라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했다. 합동정견발표회에서 김대중은 관권의 야당 탄압을 ‘토벌작전’이라고 규정했다. “나는 목포의 선거는 전쟁이 아니라 토벌작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전쟁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포로를 학대해서는 안 된다. 독가스를 써서는 안 된다.’ 그러나 목포의 선거에는 아무런 규칙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김대중을 때려잡기만 하면 되는 토벌작전이 있을 뿐입니다.”

박정희가 목포를 두번씩이나 방문해가며 사실상 선거를 지휘하자 국민의 눈과 귀가 온통 목포로 쏠렸다. 나라 안팎 신문·방송 기자들이 몰려들었고, 언론은 매일 목포 선거를 중계하듯 보도했다. ‘목포의 전쟁’에는 미국도 관심을 보였다. 미국 대사관은 서기관을 파견해 목포에 상주시켰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목포에서 멀지 않은 광주 옆 송정에 진을 치고 작전을 짰다.

“선거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박순천 선생님도 내려오셔서 남편을 지원하는 찬조연설을 하셨어요.” 민중당 대표를 지낸 박순천은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씨가 우리 김대중 후보를 이렇게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걸 보니 다음 대통령 후보감이 분명합니다. 목포시민들이 김대중 의원을 대통령 후보로 키워 주십시오.” 박순천의 말은 3년 뒤에 벌어질 일을 예언한 셈이 됐다. “청중들이 박순천 선생님 연설을 듣고 박수를 많이 쳤어요.”

목포 선거는 사생결단의 혈전이었다. 왜 박정희는 그토록 목포 선거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런 의문이 드는 것이 당연했다. “남편은 박정희 대통령이 3선개헌에 걸림돌이 될 사람을 미리 제거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박정희가 목포에 내려오는 때에 맞춰 김대중은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당신네 여당이 이처럼 부정한 방법을 사용해서까지 선거에 힘을 쏟고 있는 것은 결국 헌법을 개정해 또다시 대통령을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박정희는 다음날 유세에서 김대중의 말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나는 헌법을 고쳐서 세번이나 대통령이 될 생각은 절대로 없다. 내가 3선개헌을 하려고 한다는 것은 정치적 모략이다.” 박정희의 답변이 거짓으로 드러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선거 기간 내내 이희호는 이희호대로 뛰었다. 남편이 대규모 청중을 상대로 해 연설하는 동안 이희호는 골목을 누볐다. “지역 사정을 잘 아는 사람과 함께 다니면서 유권자들의 집을 가가호호 방문했어요. 대문이 큰 집은 그냥 지나쳤지요.” 그 시절 목포에서도 잘사는 사람들은 여당 후보를 지지했다. ‘삼학소주’ 집안도 여당 편이었다. “1970년대에 삼학소주가 망했을 때 김대중을 지지해서 보복당했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삼학소주는 박정희의 목포 본거지였다. 박정희는 목포에 내려오면 그 집에서 묵었다.

이희호를 반갑게 맞아준 이들은 가진 것 없는 서민들이었다. “집을 찾아가 보면 좁은 마당에 개, 닭을 키우고 한쪽에는 돼지우리가 있었어요. 사람과 가축이 한 울타리 안에 같이 살고 있었지요. 나는 그저 거기 사는 분들 손을 잡아주기만 했어요.” 가난한 집 사람들은 후보 안사람이 직접 찾아왔다고 고마워했다. “공부를 많이 했다던데….” 이희호가 인사를 하면 동네 사람들이 건네던 말이었다.

“유권자와 일대일로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시장에 가면 아주머니들이 나란히 앉아서 나물을 파는데, 그이들한테 손을 내밀고 인사하면 참 반갑게 대해줬어요.” 이희호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확성기를 써서 남편의 지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박정희 독재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이야기했지요.” 이희호는 남편을 자랑하지 않았다.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후보 아내의 됨됨이를 보고 마음을 열었다.

김대중의 인기는 뒤로 갈수록 치솟았다. 유세장마다 김대중을 보려는 사람들로 바다를 이루었다. “시민들이 어마어마하게 몰려들었어요. 발 디딜 틈도 없었어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밀려드니까 여당에서 더 긴장을 하고 더 집요하게 떨어뜨리려고 했지요.”

유세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떠나지 않고 김대중의 사인을 받으려고 한두 시간씩 줄을 섰다. 여학생들은 블라우스에 이름을 받아 그걸 입고 등교하고, 어린아이들은 공책에 사인을 받아 책상 위에 붙였다.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김대중을 따라다녔다. 연설하는 곳마다 나타나 이름을 부르고 환호했다. 이희호는 걱정이 되어서 더 안 오셔도 된다고 말했다. “오늘 안 벌어도 먹고살어라우.” 시장 사람들은 자기 일보다 후보를 더 생각했다.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Posted by 어니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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