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호의 팀 동료 A. J. 버넷은 시즌 종료 뒤 은퇴를 선언하고 메이저리그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는 노장 투수다. 7월21일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경기에서 선발투수로 나선 그는 6회 보크 판정을 받고 심판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닝이 끝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자신의 감독인 클린트 허들의 격려를 외면했는데 중계진은 보크 판정에 대해 허들이 적극적으로 항의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의 표시라 해석했다. 당대의 명장 허들이 팀 노장 투수가 표현한 서운함 앞에 살짝 멋쩍은 표정을 짓는 풍경은 생소했다.
7월29일 한국 프로야구. 한화의 선발투수 배영수(사진 왼쪽)는 두산을 상대로 5회 2사까지 노히트노런으로 분전했으나 연속 2개의 홈런과 볼넷을 허용하며 첫 번째 위기를 맞았다. 배영수의 투구 수는 고작 68개였으나 김성근 감독은 즉시 배영수를 강판시켰다. 선발투수의 100개 투구가 시대의 기준이 된 지금, 가뜩이나 혹사 논란에 휩싸인 한화의 불펜투수들을 감안했을 때 다소 이른 강판으로 보였다.
배영수, 강판된 뒤 불펜에서 전력투구한 사연
문제는 그때부터다. 통상 선발투수는 강판된 뒤 옷을 갈아입고 팔을 보호하며 휴식을 취한다. 그런데 강판된 배영수가 다시 불펜으로 들어가 전력으로 20개의 번외 투구를 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배영수 본인은 “좋은 감이 와서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추가 투구를 했다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이상한 설명이었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것이 조기 강판에 대한 일종의 ‘시위’라 오해될 수 있는 장면임은 배영수 본인도 잘 알 것이다. 한국 야구 우완투수의 상징이던 그가, 세월이 흘러 마운드에서 황급히 내려지는 한물간 선수가 된 현실이 아무래도 서운했을 것이다.
이틀 뒤 기아와의 경기. 1회초 수비에서 한화의 정근우(사진 오른쪽)는 높이 뜬 플라이볼을 처리하는 도중에 실수를 저질렀고, 김성근 감독은 즉시 정근우를 경기에서 빼버렸다. 문책성 교체였다. 한화에서 정근우가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했을 때 1회부터 경기에서 정근우를 삭제하는 것은 시합 전체를 흔들어버릴 수 있는 일이었다.
한국 프로스포츠는 감독과 선수 사이에 수직적인 도제 관계가 잔존하는 곳이다. 선수의 자존감은 고려하지 않는 감독의 인사권 앞에서 한국의 프로야구 선수들은 영원히 고교야구 선수들처럼 취급받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감독도 선수도 각자의 역할에 따라 구단과 계약을 맺고 있는 고용 관계에 불과하다.
성적을 위해 동원된 부속품으로 비치는 비정함
물론 감독의 가장 중요한 권한은 선수 선발과 운용에 있다. 앞선 배영수와 정근우의 사례는 역대 ‘김성근의 팀’에서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김성근은 대부분의 야구팬들의 나이보다 오래 야구를 해온 장인이다. 그 선수 교체에는 팬들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야구 장인으로서의 종합적인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매일 전쟁 같은 순위 싸움을 펼치는 와중에 흔들리는 노장들에게 매를 가하면서 경각을 불러일으키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팬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배영수와 정근우라는, 오랫동안 한국 프로야구에서 우리와 함께 울고 웃었던 노장들이 연륜이 쌓여도 고교 선수처럼 질책을 당하고, 존중을 받지 못하며, 당장의 팀 성적을 위해 동원된 부속품에 불과한 듯한 비정함이다.
야구팬으로 오랜 세월을 보내다보면, 내가 평생을 두고 좋아하는 이 취미의 품격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 기량이 쇠퇴하거나, 실수하자마자 그라운드에서 쫓겨나는 모습은 사회생활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저 메이저리그의 투수처럼 대놓고 감독에게 항명하거나 불만을 표시하지는 못해도, 야구장에서만은 우리와 함께 오랫동안 추억을 쌓아온 그 주인공들의 품위와 자존감을 상식적인 선에서는 지켜주고 싶은 것이 야구팬의 심정이다.
2015년 한국 프로야구의 주인공은 한화다. 1위도 아니고, 그저 가을에 야구 할 수 있는, 리그 절반의 팀이 되는 것에 10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던 이 팀의 선수들과 팬들이 지난 1년 동안 쌓아온 드라마는 연중 최고의 시청률을 경신하고 있다. 나는 진심으로 2015년 한화의 드라마가 최후까지 응답하길 기대한다. 그리고 기왕이면, 이 드라마가 마지막까지 어떤 품격을 잃지 않길 기원한다. 2015년 한화의 선수들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김준 스포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