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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탄핵의 순간까지, 곳곳에서 목소리 낸 김장하 장학생들

입력2025.04.10. 오후 12:07 
 
수정2025.04.10. 오후 1:27
[인터뷰] <어른 김장하> 출연한 이준호·우종원 교수, 각자 자리에서 탄핵 시국선언 이끌어
  2019년 4월 9일 문형배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출석해 자리에 앉고 있다.
ⓒ 남소연

"사회의 것을 줬으니, 나 말고 사회에 갚거라."

윤석열 탄핵 이후, 과거 청문회장에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전한 김장하(81) 선생의 말이 회자되고 있다. 문 권한대행은 2019년 4월 9일 헌법재판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고등학교 2학년 때 김장하 선생을 만나 대학교 4학년까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라며 "덕분에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사법시험에도 합격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저는 1965년 경남 하동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중략) 독지가인 김장하 선생을 만나 대학교 4학년까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인사하러 간 자리에서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갚아라' 하신 선생의 말씀을 한시도 저는 잊은 적이 없습니다."
- 당시 문형배 후보자 발언 중

그리고 여기, 또 다른 두 명의 '김장하 장학생'이 있다. 이준호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생명과학부 교수와 우종원 일본 호세이대 대학원 공공정책연구과 교수다. 이들은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77년부터 각각 석사 과정과 학부 과정을 마칠 때까지 김장하 선생으로부터 지원 받아 학업을 마쳤다. 이 인연으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에 출연해 선생의 삶을 증언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를 전후해 각자 위치에서 탄핵 시국선언을 주도했다. 이 교수가 참여한 서울대 시국선언은 탄핵 국면에 무려 네 차례나 나와 중요한 순간마다 목소리를 높였고, 우 교수가 이끈 일본 시국선언에는 일본 전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교수·연구자들의 마음이 모였다.

현재 출장으로 스웨덴을 방문한 이 교수와 일본에서 일하는 우 교수를 지난 9일 오후(한국 시각) 각각 전화로 인터뷰 했다. 아래는 이들과 나눈 대화 내용을 문답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시국선언, 걱정 있었지만 그럼에도"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에 출연한 김장하 장학생들. 왼쪽부터 이준호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우종원 일본 호세이대 대학원 공공정책연구과 교수.
ⓒ 경남MBC

- 이준호 교수님은 서울대에서, 우종원 교수님은 일본에서 각각 윤석열 탄핵 시국선언을 이끄셨어요.

이준호 교수(아래 이): "서울대는 비상계엄을 전후로 총 네 번의 시국선언을 했습니다(1차 11월 28일 525명, 2차 12월 7일 893명, 3차 12월 12일 682명, 4차 3월 31일 702명-기자 말). 저는 그 네 번의 시국선언에 서명도 했지만, 1차 시국선언부터 함께 준비를 했어요. 명단 정리를 도맡았죠.

혹시 1차 시국선언을 기억하시나요? 저는 단상에 오르진 않았고 단상 옆 계단에 서 있었습니다. 시국선언 발표 당시 곳곳에 붙었던 커다란 시국선언문을 제가 출력했답니다. 당시 학교 전체에 붙일 생각으로 100장을 출력했지요. 힘이 부족해서 전부 다 붙이지는 못했지만요(웃음). 3차 시국선언은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했는데 극우 유튜버 스피커 소리가 너무 컸던 게 떠오르네요. 중간중간 제가 마이크를 잡고 직접 발언한 것도 생각나고요.

12월 초쯤엔 일본에 있는 우종원 교수와 연락이 됐습니다. 저한테 '사안이 너무 심각해서 그냥 지나갈 수가 없다', '일본에서도 시국선언을 준비하려고 한다'고 하더군요. 당시 저도 서울대에서 1차 시국선언을 마치고 2차 시국선언을 준비하는 중이어서 보도자료는 어떻게 쓰면 좋을지 등을 공유했습니다."

우종원 교수(아래 우): "지난해 12월 3일, 한국에서 계엄이 선포됐다는 뉴스를 전해 듣고 바로 텔레비전을 켜서 상황을 살폈습니다. 계속 뉴스를 봤던 것 같아요. 너무 뜻밖의 일이었으니까요. 국회의사당을 경찰이 막고 있고, 한쪽에선 시민들이 저지하고... 또 군인들이 국회에 진입해 창문을 깨는 광경이 계속 방영됐습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이었던 게 1980년입니다. 서울의 봄이 있었던 시기죠. 그 당시 전국으로 비상계엄이 확대되면서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거잖아요. 그때 이후로 계엄군이 시민과 직면한 걸 본 적이 없는데, 2024년에 계엄군이 국회에 간다니요. 너무 충격 받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통령이 포고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이 국회를 점거하고, 국민들이 그 앞에 모이고, 국회의원들이 계엄을 해제하는 장면을 보면서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었어요. 일본에 있는 사람들도 모여서 의사 표시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국선언문 초안을 작성하면서 12월 4일 도쿄에 있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연락했지요.

그렇게 각자가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연서명을 받았습니다. 12월 4일 점심 이후부터 자정까지 서명을 받았는데 하루 반나절 만에 일본 전역에 있는 한국인 교수·연구자들 234명의 서명이 모였습니다. 저처럼 쿠데타, 계엄을 경험한 세대뿐 아니라 젊은 세대들도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 민주주의와 인권에 공감하며 서명했어요.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굉장히 감동했습니다."

- 시국선언을 준비하면서 걱정되는 점은 없었나요.

우: "일본에는 윤 전 대통령 계엄 선포에 직접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는 언론사가 적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윤석열 정부가 일본에 친화적인 외교 정책을 펴왔으니까요. 그래서일까 '(계엄 이후) 한국 정부의 정책이 바뀌면 어떡하나'라는 식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보도가 꽤 있었던 것 같아요. 일본에서 살고, 연구하고, 교육하는 교수·연구자들로서는 시국선언으로 정치적인 의사를 표현한다는 게 부담이 되는 일이긴 했죠."

이: "서울대 1차 시국선언은 지난해 11월 28일에 발표했는데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타 대학과 비교해 발표 시점이 좀 늦은 편이었습니다. 내부 구성원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거든요. 시국선언문에 어떤 내용을 담을지, 발표 시기는 언제로 할지 등을 고민하다 결정된 게 사흘 전쯤이었어요. 이틀 만에 빠르게 발기인을 모아 동참할 교수, 연구자 등에게 이메일을 돌렸고, 연서명 인원 525명(단일대학 최대 규모-기자 말)을 모았습니다.

사실 시국선언은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동참하기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이공계는 알게 모르게 낙인이 찍혀 연구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거든요. 그렇게 되면 본인뿐 아니라 함께 연구하는 대학원생들까지도 힘들어지니까 조심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이름 대신 마음으로 참여하신 분들까지 하면 (참여자 수는) 더 많을 거라 봅니다."

  윤석열 대통령 퇴진과 김건희 특검을 촉구하는 서울대학교 교수-연구자 525명이 지난해 11월 28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 박물관 강당에서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대통령을 거부한다’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 권우성

  지난해 12월 6일 자 서울경제신문에 우종원 일본 호세이대 대학원 공공정책연구과 교수가 이끈 한국인 교수·연구자 234인 시국선언이 소개됐다.
ⓒ 서울경제

- 헌재의 윤석열 탄핵 선고 일정이 길어지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이: "저는 탄핵이 인용될 거라는 믿음이 훨씬 강하긴 했습니다. 선고 일정 공지가 길어지고, 워낙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니까 (탄핵이 기각될까) 걱정하기도 했지만요. 그래도 주변 사람들에게는 '헌재 권한대행이 저분(문형배)이라는 건 다행인 일이다', '중심을 잘 잡을 사람이니 괜찮을 거다'라고 말하며 선고를 기다렸어요.

선고 당일엔 회의가 있어서 차로 이동하는 중이었습니다. 운전하며 라디오로 선고를 듣다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선고가 거의 끝나가더라고요.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끝까지 들었지요. '문 권한대행을 포함해 헌법재판관들이 무지 고민 많이 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렇게 상식에 부합하는 멋진 판결문을 위해서 늦었구나', '그동안 고생 많았구나' 하고요.

결정문 중간에 국회를 지적하거나, 윤석열이 당시 상황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등을 언급하는 대목도 있었잖습니까. '이 대목 때문에 재판관들이 의견 조율이 힘들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우: "저는 기각이나 각하보다는 6 대 2로 인용될까 봐 걱정했습니다. 재판관 8인 중 6인 이상이 인용 결정을 내리면, 파면이 되긴 하지만 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러잖아도 한국 사회 분열이 심각한데 더 심각해질 수도 있는 거고요.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자기 이익을 얻으려는 이들이 전면에 나타날까 봐 걱정했습니다. 결과적으로 8 대 0, 만장일치 파면 결정이 나서 매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헌재 내에서 어떤 절차를 거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를 보면 문 권한대행이 만장일치를 끌어내기 위해 숙의를 거듭한 것 같습니다.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헌법적 가치와 인권, 민주주의 존중 등 국민 모두에게 의미를 갖는 의사 표시를 해줬다고 생각합니다."

김장하 선생의 '밀알'

  3월 28일 저녁 진주에 들렀던 이승환 가수와 함께 한 김장하 선생과 김주완 작가(오른쪽).
ⓒ 윤성효

- 두 분은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에 김장하 장학생으로 출연하시기도 했는데요.

이: "탄핵 이후 넷플릭스에서 <어른 김장하>가 역주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웃음). 김장하 장학생으로 공부했던 점이 시국선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사람에 대한 존중을 항상 고민하시는 분이시거든요. 저에게 김장하 선생님은 삶의 지표입니다.

제가 서울대 자연과학대 학장을 4년간(2018.06.~2022.06.) 한 적이 있습니다. 학장 출마를 하면 공약 발표를 하는데요. 저는 당시 (발표문) 첫 장에 신문 기사 하나를 소개했어요. 제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 대학입학 예비고사 이과 전국 수석을 하면서 인터뷰했던 옛날 신문 기사요. 내용 중 '이름을 밝히길 거부한 한 독지가로부터 장학금을 받아서 공부할 수 었었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그 독지가가 김장하 선생님이었습니다.

공약 발표를 하면서 '저는 이분 덕분에 아무 고민 없이 과학을 할 수 있었고,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학장이 되면 자연과학대에 입학하는 모든 학생들이 가정 형편과 관계없이 꿈을 이룰 수 있게 뒷받침하겠다'라고 약속했습니다. 결국 학장에 당선되고 4년 동안 참 열심히 한 것 같아요. 장학금도 많이 만들었고요."

우: "저는 김장하 장학생으로서 공부했던 경험이 제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고, 보통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선생님이 제게 주신 가르침이거든요. 그런 가르침을 받아온 저로서는 우리가 쌓아온 민주주의가 느닷없는 계엄으로 무참히 무너지는 걸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사 표현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일본에서 시국선언을 하게 된 겁니다.

또 저는 단순히 장학금을 받는 수혜자로서가 아니라, 선생님의 제자로서 삶의 방향을 배웠습니다. 저는 한국 사회와 일본 사회가 비슷하다고 생각해, 일본에서 공부하면 한국에 시사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일본으로 유학을 왔어요. 제 전공이 경제학인데 경제학에도 여러 분야가 있잖습니까. 그중 어떤 분야를 공부할까 선택의 기로에 놓였어요. 금융을 전공해 돈의 흐름을 공부해도 일본 사회를 알 수 있을 것 같았고, 노동을 전공해 일본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공부해도 일본 사회를 알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때 제가 선택한 건 노동이었습니다. 김장하 선생님께서 '어떤 공부를 택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항상 사람을 중요하게 보시지요. 보통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소중히 여기고 꿈꿔 오셨으니 저도 노동 분야를 선택한 겁니다. 지금까지도 그런 문제들, 예를 들면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격차, 고용 정책, 노동 정책 등을 계속해서 연구하고 공부하고 있어요. 선생님 가르침의 성과입니다."

- 최근 김장하 선생님과 연락한 적이 있나요?

이: "탄핵 선고 다음 날(4월 5일) 선생님과 통화했습니다. 선생님과는 항상 무슨 일 있을 때마다 뵙고 연락드리고 하는데요. 선생님 목소리가 최근 들은 것 중 제일 밝았습니다. (서울대 시국선언 관련해서는) 원래 직접적으로 표현을 하지 않는 분이셔서 별말씀 없으셨어요.

다만, 제가 '일이 잘 풀렸으니 조만간 뵙고 식사 한번 하시지요'라고 말씀드리니 '좋다'고 답하셨어요. 봄꽃이 가기 전에 뵙기로 했습니다. 일본에 있는 우종원 교수도 시간을 내서 오기로 했어요. 이번 기회에 점심 함께하려 합니다."

우: "시국선언 전후로 연락드린 적은 없습니다. 선생님께 심적인 부담을 드려선 안 된다는 생각이었거든요. 선생님께서도 원래 저에게 (조언 등) 말씀한다거나 부담을 주는 건 안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도 이심전심이랄까요? 언제나 마음이 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뵙기로 했어요.

선생님께서 계엄 이후에(2024년 12월 6일) 진주시청 앞에서 열린 '윤석열 체포 시국대회' 참석하신 일은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께 직접 들은 건 아니고 전해 들었어요. 소식을 들으니 선생님께 죄송스러웠습니다. 평생 사회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오신 분이잖아요. 그런 분께 또다시 추운 날 촛불을 들게 하는 사회가 참...

하지만 동시에 '역시 김장하 선생님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팔순이 됐는데도 노구를 이끌고 밖에 나가서 많은 시민들, 젊은 친구들과 함께 의사 표시하시는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2023년 4월 22일 경남 하동 차밭을 찾은 김장하 선생.
ⓒ 윤성효

이: "서울대 민주화교수협의회 임시 대표로서 역사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또 엄청난 수의 서울대 교수 연구자가 힘을 모아 주셔서 보람과 감사한 마음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우: "지난해 12월 3일 계엄이 선포된 직후 되도록 빨리 시국선언을 발표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짧은 시간 동안 일본 전역에서 뜻을 모아주셨던 교수·연구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이런 말씀 드릴 기회가 잘 없으니 김장하 선생님께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뿌려주신 밀알이 나름의 수확을 거두고 있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계속해서 좋은 영향을 오래오래 사회에 미쳐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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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배 안부인사에, 김장하 선생 "단디해라 했다" https://omn.kr/2cx0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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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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