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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7.07 [서민의 어쩌면] 대통령의 연승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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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어쩌면] 대통령의 연승신화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싸움의 승패를 따지는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잘못을 누가 더 많이 했는지에 무관하게 먼저 사과를 하는 쪽이 패자였다. 어른들은 “지는 게 이기는 거다”라는 철학적인 얘기를 하곤 했지만, 또래들이 보는 앞에서 “미안해”라고 하는 건 정말 모양 빠지는 일이었고, 그 어른들도 막상 자신들이 싸울 땐 일체의 양보가 없었다. 둘째, 울면 지는 거였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겁을 먹었거나 싸운 것 자체를 굉장히 후회한다, 이런 의미로 해석이 됐으니까.

이런 얘기를 한 이유는 남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 대통령께서 연승신화를 써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일어난 사건을 보자.

세월호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우여곡절 끝에 특별법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대해 대통령은 특별위원회의 독립적 조사를 무력화하는 내용을 담은 시행령을 만들어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이건 애써서 특별법을 만든 국회에 대한 정부의 폭력이었기에, 안되겠다 싶었던 국회는 소위 ‘국회법 개정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킨다. 개정안의 내용은 국회가 정부를 견제할 수 있도록 보다 강한 권한을 갖자는 것이니, 대통령 입장에서는 이 개정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자신의 권한인 거부권을 행사했고, 개정안은 무효가 됐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이해가 가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은 그 직후에 벌어졌다. 대통령이 불같이 화를 냈고, 여기에 대해 새누리당의 유승민 원내대표가 “대통령에게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면서 사과한 것. 허리를 무려 90도로 구부리면서 말이다.

생각해 보자. 민주주의는 삼권분립이 원칙이고,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입법부인 국회와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대통령이 먼저 시행령을 만들어 국회를 공격했고, 국회가 개정안으로 반격을 가했다.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자 새누리당은 개정안을 폐기시킴으로써 이 사태는 종결됐는데, 마지막 공격을 한 쪽이 대통령이니 국회가 좀 더 화가 나야 정상이지만, 오히려 대통령이 펄펄 뛰며 화를 내고 있다. 유 원내대표는 90도 사과에도 불구하고 현재 쫓겨나게 생겼으니, 이건 누가 봐도 대통령의 압승이다.

대통령은 국민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6월 한 달간 우리나라를 공포로 몰아넣은 메르스로 인해 자영업자들은 장사가 안 돼 울상이었고, 외국 관광객은 발길을 끊었으며, 환자들은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10조원의 손실을 냈다는 이 사태의 책임은 초기대응을 잘하지 못한 정부에 있으니, 여기에 대해서 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사과를 해야 했다.

하지만 정작 사과를 한 분은 황교안 총리였는데, 총리가 된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은 분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사과를 했는지 의아하다. 반면 대통령은 아직도 사과를 안 하고 버티고 있는데, 이대로 간다면 국민에게 값진 승리를 거두게 된다.

2015년 7월6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김용민의 그림마당]



메르스 이전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궜던 것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에게 여권 실세들이 돈을 받았다는 소위 성완종 리스트였다. 당사자들은 돈을 받지 않았다고 부인했지만, 그들의 변명은 하나둘씩 거짓말로 드러났다. 사정이 이렇다면 검찰이 리스트에 연루된 이들을 조사하는 게 당연할 텐데, 대통령의 인식은 국민들의 허를 찔렀다. 성 전 회장에게 돈을 받은 정치인들이 나쁜 게 아니라, 감옥에 있는 성 전 회장을 사면해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나쁘다는 것. 이런 식이면 성 전 회장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정말 신기하게도 검찰은 성 전 회장이 어떻게 사면이 됐는지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결국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의 형인 노건평씨가 뇌물을 받고 사면을 해줬음을 밝혀내는 성과를 거뒀고, 대통령과 친하지 않은 ‘비박’ 정치인 두 명에 대해서만 기소를 하고 나머지는 무혐의로 처리함으로써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사법부도 엄연히 삼권분립의 주체건만, 사법부는 대통령을 견제할 생각은 오래전에 포기한 듯하니 여기서도 대통령이 가볍게 1승을 챙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월호가 침몰한 뒤 진도체육관을 찾은 대통령은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난 천안에 마련된 분향소에만 가도 눈물이 나던데, 유족들이 오열하는 현장에 가서도 울지 않은 것은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 이후에도 대통령은 국회 앞에서 기다리는 유족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는 등 기싸움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으니, 유족들에게도 1승을 거둔 셈이다.

이쯤 되면 대통령을 ‘승리의 보증수표’ ‘천부적인 싸움꾼’으로 불러도 무방할 듯싶은데, 그러고 보니 박 대통령이 왜 노무현 전 대통령을 한심하게 봤는지 이해할 법하다. 노 전 대통령은 걸핏하면 눈물을 보이고, 평검사들과 대화를 시도한 데다 국민들한테 미안하다고 뻔질나게 사과하는 그런 대통령이었으니까. 승률 100%인 박 대통령이 앞으로도 계속 연승신화를 써내려갈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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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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