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석인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 국민단식농성장에서 열린 '세월호 가족과 함께 보내는 국민 한가위'에서 유가족과 시민들이 제대로 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진실의 배' 띄우기를 하고 있다. | |
ⓒ 유성호 |
4월 16일, 온 국민은 3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어가는 광경을 생중계로 지켜봤다. 안전불감증에 대한 지적과 해경의 무능, 정부의 관리부실이 화두로 떠올랐다. 국민적인 비판여론이 들끓자 사고 한 달 만에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발표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처참한 사고를 겪은 한국사회가 급물살을 타고 크게 변화할 듯했다. 사고의 재발을 막아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했고, 유가족에 대한 위로와 희생자에 대한 애도의 목소리도 잇달았다.
그런데 9월 말 현재,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정부가 냈던 자성의 목소리는 마지못해 취했던 행동이었던 걸까. 6월 지방선거와 7월 재보선 등 두 차례의 선거가 여당의 승리(혹은 선방)로 귀결되자, 세월호 이슈를 대하는 정부와 여당의 반응은 급속도로 싸늘해졌다.
선거를 앞두고 유권자에게 '도와주세요'라고 부탁하던 새누리당은 이내 기세등등해졌고,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보수진영의 막말도 날로 더해가고 있다. 유가족은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했지만, 선거가 끝난 후에는 모두 외면당했다. 보수언론은 수사·기소권이 보장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을 한 유가족 김영오씨가 불순한 사람이라며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았다.
결국 관심이 분산된 사이, 사고의 진상을 밝히지도 못한 채 국정조사는 끝났고, 대통령이 약속했던 세월호 특별법은 여전히 걸음을 떼지 못하고 표류 중이다. 현재진행형인 사고 자체와 더불어 사고를 수습하는 능력, 사고를 대하는 사회의 태도까지도, 침몰한 세월호처럼 제자리걸음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인 셈이다.
세월호 정국에서 거리로 나온 일베, 그리고...
▲ 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앞에서 일베 회원들과 시민들이 피자와 치킨을 먹고 있다. | |
ⓒ 이희훈 |
광화문 광장에선 세월호 유가족과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이 단식투쟁을 벌였고 그 반대편에서는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 회원들이 '폭식투쟁'이라며 보란 듯이 피자와 치킨을 뜯었다. 일베와 보수단체는 '균형'을 갖추고자 광장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말하지만, 그러면서도 꾸준히 균형을 무너뜨리기 위해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폄하를 시도했다.
그들은 수십 억에 이르는 거액의 보상금과 자녀 특례입학 등 사실이 아닌 정보를 '유가족의 요구'라 주장하면서, 세월호 유가족 측을 천안함 유족들과 비교하고 그 정당성을 멋대로 저울질했다. 자신들의 정당성은 교묘하게 확보하면서, 목표로 삼은 집단의 이미지를 철저히 깎아내리는 집요함은 영리한 정도를 넘어서 '교활하다'고 할 만했다.
세월호 정국에 거리로 나온 일베는 확실히 자신감을 얻은 듯 보였다. 열등감에 젖어 한국 여성을 '김치녀'라 비난하고, 전라도에 대한 지역감정을 자극하며 우월감을 얻던 '정신승리'에서 한 발 나아간 것일까. 9월 6일 광화문 광장에서 즐겁게 춤추며 손가락을 구부려 '일베 인증'을 하던 그들의 모습은, 인터넷상에서 조금씩 세력을 늘려가던 '온라인 우익'이 마침내 현실공간에 등장한 '비극적인 순간'이었다.
이는 약자를 헐뜯으며 자신을 그 대상들과 차별화하고,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의 정체성을 얻고자 하던 '소박(하면서 동시에 천박)한 욕망'에 그치지 않겠다는 그들의 의지가 표현된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거리에 나온 일베'를 두고 진보진영의 우려 섞인 지적도 늘어났다.
문제는 '광장에 일베가 나타났다'라는 사실에서 그치지 않고, 점점 더 커져가는 어떤 분위기에 있다. 지난 28일 서울시청 광장에는 '서북청년단 재건'을 주장하는 집단이 등장했다. 그들은 "너덜너덜해진 노란 리본을 따로 모아 시청에 영구보관하자"며 조형물 제거를 시도했는데, 이는 세월호 희생자 애도마저도 이쯤에서 그만두라는 강요와 같았다. 정부를 향한 비판이 제기될 요소를 아예 덮어버리자는 듯한 행동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안에 대한 피로도 증가... 탄력받은 극우세력의 등장
▲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 극 중 영신(이은주 분)은 전쟁이 벌어지는 중 끼니를 해결하고자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그 대가로 참혹하게 죽음을 맞는다. | |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
한동안 카카오톡을 통해 중장년층에 대대적으로 살포된 메시지에는 유가족들이 거액의 보상금과 국가유공자 대우, 대학 특례입학을 요구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 메시지에 담긴 내용 대부분은 유가족들의 요구와는 상관 없는 유언비어였지만, 그것과 별개로 특정한 태도와 은밀한 담론을 내포하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라는 사안에 대한 대중의 '피로도'가 상당히 높아졌다는 것, 그리고 이를 죄책감 없이 벗을 수 있게끔 유가족을 매도하는 '프레임'이 그것이었다. 유가족이 부당한 요구를 하고 출신성분이 불순하니, 더 이상 그들을 감싸고 지지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식이다.
세월호 정국을 중심으로 파동이 커지다가 끝내 파도가 되어가는 것인지, 분위기를 몰아서 여러 집단이 물 만난 고기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실명이나 신상이 공개되기를 꺼리던 일베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광장에 나오고, 과거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의 발기인이었던 인물이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의 대변인 자격으로 광화문에 섰다. 세월호 유가족을 '불순한 반정부 선동세력'으로 규정하고 규탄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서북청년단 일원'임을 분명히 선언했다.
서북청년단은 분명 한국 근현대사에서 동족상잔의 슬픈 역사를 낳았던, 지독하게 잔인했던 테러행위를 반공으로 포장한 극우단체를 뜻하는 것일 게다. 서북청년단은 '좌익세력 소탕'을 이유로 무고한 사람들을 수없이 학살한 주범인데다, 백범 김구를 암살했던 안대희도 이 단체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이름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을 통해서 '서북청년단'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11년 전 개봉했던 이 영화는 피를 나눈 두 남자, 진태(장동건 분)와 진석(원빈 분)이 전쟁터를 배경으로 형제에서 적으로 다시 만나는 슬픈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비극적인 둘의 관계는 한 편의 드라마이면서, 동시에 한반도의 분단 현실을 압축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극 중에서 영신(이은주 분)은 '식량을 배급받을 수 있다'는 말에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영문도 모른 채 빨갱이로 몰려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 속 영신처럼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수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5천여 명, 최대 20만 명까지 추산된다. 당시 서북청년단은 이처럼 민간인을 대상으로 자행된 국가적 테러를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이런 역사를 가진 이름의 단체를 2014년이 된 오늘날 다시 현실에서 보게 된 것은, 아마 극우세력이 점차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로 인한 대중의 감정 소모가 컸다는 이유로 유가족의 주장에 반대하는 집단이 탄력을 받은 셈이다. 한 사안을 두고 기계적으로 균형을 맞추려는 구도 속에서, 보수진영의 뜻을 반영한 극우세력이 등장하며 나름의 역할을 당당하게 획득하는 중이다.
'국민대통합' 외치던 박근혜 대통령, 어째서 보고만 있는가
▲ 가위와 박스를 든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 회원들이 28일 오후 서울광장에 설치된 세월호참사 추모 노란리본 강제철거를 시도하며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 |
ⓒ 권우성 |
앞서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은 일베를 적극 옹호한 바 있다. 그는 폭식투쟁 등 과격한 표현법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서도, 일베를 아직 자정능력이 사라지지 않은 '20대 청년우파'라 치켜세우기도 했다. 이러한 발언은 일베의 극단적인 태도에서 그들의 논리와 프레임을 분리수거하여 이용하려는 시도 아닐까? 그래서인지 채찍질을 하는 듯하다가 당근을 던져주는 하 의원의 자세는 마치 '일베 길들이기'처럼 보인다.
아찔한 것은 이런 의도가 한 사람의 것이라고 여기기 힘들다는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의 단식투쟁과 광화문 천막농성은 연이어 비난하던 여당 의원과 보수언론은 '조롱을 무기 삼은 일베'와 '서북청년단 부활'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후보 시절 '국민대통합'을 외쳤던 박근혜 대통령마저도 "순수한 유가족 발언 담아야" 발언으로 세월호 유가족을 고립시키는 데 한몫 거들었다. 반면 '대통령 모독'에는 직접 발언을 아끼지 않으면서, 극우세력의 '국민 모독'에는 침묵과 방관의 자세에 그치고 있다.
보수적인 가치가 아니라 극우적 메시지에 더욱 매달린다면, 당장의 지지율 상승은 이끌어낼 수 있겠지만 그것이 어찌 애국인지 의문이다. 국가라는 권위를 등에 업은, 폭력이 만연한 사회는 퇴보할 가능성이 크고, 기존의 질서를 지켜내는 일조차 힘들 것이다. 보수진영의 이익에 부합된다는 이유로 극우세력의 준동을 그저 무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세비반납'이 언급되어야 할 정도로 정치집단이 스스로의 역할을 포기하는 꼴 아닌가.
'아듀 세월호'를 외치며 지난 27일 이루어진 위험천만한 길거리 화형식을 보면, 나날이 과격해지는 보수단체의 행동에 제동을 걸어야 할 이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선명해진다. 과열되며 극단적인 충돌로 치닫는 광화문 현장을 볼 때, 더 이상의 국론 분열을 막기 위해서라도 정부 차원에서 자제를 촉구해야 마땅하다.
'표현의 자유'로 용납하기 힘든, 야만의 역사를 지닌 '서북청년단' 재건이 거론되는 사회를 이대로 두고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만 한다. 기울어가는 세월호 정국을 틈타서 고개를 든 극우세력을, 박근혜 대통령은 과연 지켜보기만 할 것이냐고 말이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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