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동 어록’ 읽던 대학생, 어떻게 ‘국정원 댓글녀’가 됐나

등록 : 2013.11.19 20:47 수정 : 2013.11.20 15:30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국정원 직원의 댓글 활동 재구성
커피숍 돌며 ‘오유’ 접속…댓글 작업에 하루가 짧았다

‘국정원 각본, 감독, 제작, 주연.’

국가정보원이 국군 사이버사령부에 심리전 지침을 내린 것으로 드러나면서 사이버 공간의 국가기관 정치개입 활동이 국정원의 총괄적인 지휘, 통제 아래 이뤄졌을 개연성이 커졌다. 국정원이 자체 심리전단 인력을 동원해 총선과 대선 등 민감한 시기에 사이버 정치여론을 조작했다는 사실은 검찰 수사로 밝혀진 바 있다. 국정원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군 사이버사령부에 예산을 지원하고 수시로 지침을 내려 사이버 여론조작 활동 방향을 제시했다. 나아가 국정원 직원의 신분을 민간인으로 세탁해 군의 정훈교육 강사로 내보내기도 했다. 국가보훈처의 정치개입 활동에도 국정원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국정원이 ‘사이버 여론조작 컨트롤타워’였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국정원 직원 김아무개씨가 어떤 식으로 활동했는지도 새삼 주목받고 있다. 김씨의 활동을 재구성해본다.


“이번 태풍 지난 간 후 청와대에서 각 언론사에 배포될 기사 제목. 피해가 많던 적던 그건 상관없음. 그냥 아무렇게나 끼워맞추면 되니. ‘4대강 덕에 100년만의 큰 태풍에도 피해 줄어’” 국가정보원 직원 김아무개(29)씨가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오늘의유머’(오유) 누리집에 가입한 지난해 8월27일 처음 반대를 누른 게시글이다. 김씨는 오유에 가입한 지 10분 만에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사업을 비판하는 글에 ‘반대’를 눌렀다. 다음날인 28일 김씨는 오유에 4개의 아이디를 더 만들었다. 오유는 이메일 계정만 제시하면 실명이나 주민번호, 전화번호 없이도 얼마든지 아이디를 만들 수 있다. 김씨는 이 아이디들을 이용해 “좌좀(‘좌파좀비’라는 뜻으로, 진보적인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 OUT!”이라는 글에 ‘추천’을 눌렀다. 그리고 “북한에 퍼줘 봐야 돌아오는 건 포탄밖에 없더랑”이라는 댓글을 올렸다. 이날부터 오유에서 대선 등 정치와 관련된 댓글을 다는 김씨의 ‘심리전이라는 이름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김씨는 2003년 서울의 한 사립대학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한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학회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하기도 했고 컴퓨터 동아리에도 가입해 활동했다. 자신의 미니홈페이지에는 입담이 뛰어난 방송인 김제동씨의 어록들을 스크랩해놓는 등 약간의 사회비판적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2007년 졸업을 한 뒤에는 취업이 큰 걱정이었고, 졸업한 이듬해 국정원에 합격한 뒤엔 뛸 듯이 기뻐했다.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20대들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던 김씨가 여느 20대와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은 국정원에서도 심리전단에서 배속되고 난 뒤부터다. 2008년 입사해 7개월 동안 체력, 공수, 해양 훈련과 지리산 종주 훈련을 마친 김씨는 2010년 10월부터 국정원 심리전단에 배치됐다. 그리고 대선을 앞둔 2012년 8월부터 본격적인 사이버 활동을 시작했다.

정부 비판 ‘반대’ MB 칭송 ‘추천’ 꾹
오늘은 ‘오빤 MB스타일’ 업로드
점심쯤 사무실에 가 보고를 한다
다시 나와 커피숍서 또 댓글 작성

김씨가 속한 심리전단은 4개 팀으로 나뉘어 있었다. 1팀은 기획업무를 했고, 2팀은 대형 포털 사이트를 맡았다. 김씨가 속한 3팀은 유머 누리집인 오유와 일간베스트저장소, 증고차 매매 누리집인 보배드림 등 중소 인터넷 커뮤니티를 맡았다. 5팀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전담했다. 국정원 심리전단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주요 인터넷 공간을 활동 무대로 삼아 분위기를 장악해나갔다. 김씨가 주로 하는 업무는 오유에 게시글을 쓰는 일이었는데 보안을 철저히 유지해야 했다. ‘심리전단 업무매뉴얼’에 따르자면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 청사 근처에서 활동하지 말아야 했고, 폐쇄회로카메라(CC-TV)에 잡히지 않도록 출입문에서 먼 곳을 골라 작업해야 했다. 자신 명의의 신용카드를 사용해 흔적을 남기는 일도 피해야 했다. 같은 커피숍을 여러 번 찾는 것도 금지됐다. 또 작성한 글은 1~2주 단위로 삭제해야 했다. 김씨는 자신이 거주하던 오피스텔 근처인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커피숍을 비롯해 명동, 신사동 등지로 돌아다니며 인터넷에 접속해 오유에 글을 남겼다. 국정원 직원이 업무시간에 정치에 개입하는 사이버 활동을 펼치려면 신분을 숨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이버 댓글 활동의 방향은 간명했다. 정부를 비판하거나 야권 문재인, 안철수 후보를 옹호하는 글에는 주저 없이 반대를 눌렀다. 반면, 이명박 정부를 칭송하는 글을 쓰거나 동료들이 작성한 글에는 추천을 눌렀다. 가끔 팀장에게서 긴급 지시를 받기도 했다. 지난해 8월28일 이명박 전 대통령을 칭송하는 ‘오빤엠비스타일’ 동영상을 오유에 올린 것도 팀장의 긴급 지시에 따른 일이었다.

김씨의 하루일과는 비교적 단순했다. 적당한 커피숍에 자리잡고 오유를 모니터한 뒤 게시글을 썼다. 점심시간쯤 내곡동 국정원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 인터넷 활동을 보고했다. 보고 뒤에는 그날 심리전 지침을 받은 뒤 청사 밖으로 나왔다. 김씨는 다시 카페 등을 떠돌며 노트북을 켜고 누리꾼들과의 심리전을 벌이다 오후 6시께면 퇴근했다.

김씨가 맡은 중소 인터넷 커뮤니티 가운데는 실명인증이 필요한 곳도 있었다. 한 개 아이디로 심리전을 벌이면 눈치 빠른 누리꾼들이 뭔가 눈치챌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 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지난해 9월 초부터 오유에서는 김씨를 ‘알바’로 지목하는 게시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런 글들을 찾아 ‘반대’를 누르긴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김씨가 이런 애로사항을 팀장에게 말하자 곧바로 민간인 이아무개(42)씨의 주민등록번호가 지급됐다. 김씨는 더 많은 아이디를 이용해 심리전에 더욱 몰두했다.

김씨가 받은 심리전 지침에는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 비판, 이명박 대통령의 해외 순방 찬양, 문재인 민주당 후보의 조건 없는 금강산 관광 재개 정책에 대한 비판, 나로호 성공발사 기원 등도 포함돼 있었다. 북한과 무관한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김씨는 판단은 ‘윗선’의 몫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시킨 대로 할 뿐이었다. 한때 좋아했던 방송인 김제동씨에 대한 비판 글도 올려야 했다. 김씨는 “개인적으로 김제동님 참 좋아하는데 해군기지 관련해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네요. (중략) 괜히 여기저기서 몰려와 해군기지를 반대한다는 사람들 때문에 강정마을 주민들이 더 고통받는 게 아닌가 싶네요”라고 지난해 10월3일 중고차 매매 누리집인 보배드림 게시판에 적었다.

흔적은 남겨선 안된다
작성글도 1~2주 단위로 삭제한다
알바 지목되면 아이디 바꾸면 그만
판단은 윗선의 몫, 시키는대로 할뿐

김씨의 ‘심리전’은 지난해 12월11일에야 끝났다. 이날도 김씨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냈다. 오후 3시50분께 오유에 접속한 김씨는 “재외 투표 걱정 되는군요”라는 제목의 글에 반대를 눌렀다. 대선을 앞두고 재외국민투표에서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올 것을 걱정하는 내용의 글이었다. 김씨는 아이디를 바꿔가며 이와 유사한 글 12개에 반대를 눌렀다. 그리고 자신이 쓴 글 7개를 삭제한 뒤 오후 4시40분께 북한 로켓 발사를 비난하는 ‘북한 기술력이 부럽다니’라는 제목의 글을 하나 남긴 뒤 오유 활동을 마쳤다. 그리고 두 시간 뒤 민주당의 신고를 받은 선거관리위원회 직원과 경찰이 김씨의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오피스텔에 찾아갔다. “국정원 직원이냐?”고 신원을 묻는 선관위와 경찰 직원들에게 김씨는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오피스텔로 들어간 김씨는 문을 닫고 3일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12일 새벽 1시께에는 자신의 노트북에 있는 187개 파일을 영구 삭제하는 등 흔적 지우기를 시도했다. 경찰은 김씨의 정체가 드러난 지 5일 만에 “범죄 사실을 찾을 수 없다”는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대선후보 토론회가 끝난 직후인 밤 11시에 나온 경찰의 이 발표는 경찰의 사건 은폐 시도 논란을 낳았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대통령이 된 이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국정원의 심리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처럼 보였다. 민병주 심리전단장은 대선이 끝난 12월20일 오후 2시 김씨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선거도 끝나고 흔적만 남았네요. 김○○씨 덕분에 선거 결과를 편하게 지켜볼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삭제해도 댓글의 흔적은 인터넷에 남았고 꼬리가 잡혔다. 김씨는 현재 심리전단에서 국정원 내부 다른 부서로 배치돼 일하고 있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한겨레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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