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연남'은 여왕의 무덤? 서서히 시작된 정권 몰락
[게릴라 칼럼] 고려 초기 정국의 핫이슈, '천추태후의 남자' 김치양
14.12.02 21:12
최종 업데이트 14.12.02 21:12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
섭정 기간 동안 천추태후는 귀족을 견제하고 신진세력을 등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 신라 말기부터 왕권을 위협해온 호족(지방세력)을 통제하는 데도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이런 노력은 좁게 보면 자신과 왕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넓게 보면 중앙과 지방의 기득권층을 약화시키고 계층 간의 균형을 이룩하는 데 상당히 기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천추태후의 정치 인생은 비참한 몰락으로 끝났다. 몰락도 이만저만한 몰락이 아니었다. 쿠데타로 정권이 붕괴되는 수준의 몰락이었다. 천추태후의 몰락은 자신의 과오에 기인한 측면도 있지만, 다른 인물이 그를 파멸로 몰아넣은 측면도 있었다.
그런데 그 인물은 태후의 정적이 아니었다. 태후와 아주 가까운 사람, 태후의 남자인 김치양이 그 주인공이었다. <고려사> 김치양 열전에서는 김치양이 태후의 외족(外族)이라고 했다. 어머니 쪽 친척이었던 것이다.
신라와 고려 왕실에서 근친혼을 허용한 이유 중 하나는, 왕실 밖으로 권력을 분산시키지 않는 데 있었다. 그래서 왕실의 근친혼은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였다. 하지만 김치양 같은 비(非)왕족이 왕실 친척과 부적절한 관계를 갖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이것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문제였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궁궐 안 '불법적 만남'
▲ <고려사> 김치양 열전. | |
ⓒ <고려사> |
그렇지만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개의치 않았다. 남편인 제5대 경종 임금이 죽고 천추태후가 대비가 되자, 이들은 궁에서 불법적 만남을 가졌다. 김치양이 궁궐에 출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김치양은 머리를 깎고 승려를 가장해서 태후의 처소를 출입했다. 두 사람에 관한 소문은 널리 퍼졌다. 그것은 천추태후의 오빠이자 당시 임금인 제6대 성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성종은 소문의 확산을 막고자 김치양에게 곤장을 친 다음 귀양 보냈다.
참고로 천추태후의 남편인 경종이 죽은 뒤 태후의 오빠인 성종이 임금이 되는 것은 조선시대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고려시대 왕실에서는 근친혼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런 일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천추태후는 태조 왕건의 손녀이자 남편인 경종의 사촌누이였다. 경종이 죽은 당시, 경종과 천추태후의 자식인 목종은 두 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태조의 손자이자 경종의 사촌형제이며 태후의 오빠인 성종이 왕이 된 것이다.
김치양의 귀양으로 스캔들이 종료되는가 싶었지만, 성종이 죽고 목종이 왕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997년에 목종의 등극과 함께 사실상의 여왕이 된 천추태후(당시 34세)는 김치양을 정부로 불러들였다. 이로써 두 사람의 관계는 정국의 핫이슈로 부각되었다.
김치양이 처음에 받은 관직은 정7품이었다. 이때까지도 그의 정치적 위상이 매우 낮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불과 몇 년 뒤 김치양의 관직은 정2품으로 수직 상승했다. 그는 상서도성 우복야(정2품) 겸 삼사사(三司使, 정3품)가 되었다. 이 같은 초고속 승진은 전적으로 천추태후의 작품이었다.
고려시대에는 국정을 심의하는 중서문하성이 국정 집행을 감독하는 상서도성(상서성)보다 위에 있었다. 김치양이 받은 우복야란 관직은 상서도성의 차관이었다. 상서도성이 국정 집행을 감독했다고 해서 이 기구가 구체적 행정사무를 집행한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행정사무는 상서도성 하부에 있는 6부의 소관 사항이었다. 한편 삼사사는 재정이나 회계를 담당한 삼사라는 관청의 차관이었다.
국정 농단한 김치양, '그 이상의 것'을 꿈꾸다
우복야 및 삼사사는 품계는 높지만 어디까지나 차관이었다. 따라서 행정부 전체나 특정 관청을 책임질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고려 정부의 권력은 김치양의 손아귀에 집중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최고권력이 천추태후-김치양 커플에게 집중됐지만, 그런 최고권력을 구체적으로 행사한 것은 김치양이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정부의 인사권도 김치양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 점을 이용해서 그는 친척이나 측근을 정부 요직에 앉혔다. <고려사>에서는 "모든 관료의 임명과 해임이 그(김치양)의 수중에 달려 있었다"고 말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이 시기에는 국무총리도 대통령 비서실장도 허수아비였다. 국정을 심의하는 권력이 중서문하성에서 나오지 않고, 국정 집행을 감독하는 권력이 상서도성에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김치양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사적 모임이 사실상의 정부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 시기는 합법적 권한을 갖지 못한 김치양이 국정을 농단하는 시대였다. 김치양이 정2품의 관직을 갖고 있었다고는 해도 그가 국정을 운영할 권한은 없었으므로 그의 국정 운영은 불법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김치양은 이 정도 선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그 이상의 것을 꿈꾸었다. 왕의 아버지가 되는 것까지 꿈꾸었던 것이다. 그런 꿈을 꿀 수 있었던 것은 그와 천추태후 사이에서 생명이 잉태됐기 때문이다.
태후의 몸에서 자기 아이가 태어나자, 김치양은 그 아이를 차기 임금으로 만들고 싶었다. 목종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야망이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태조 왕건의 손자인 왕순이 유력한 후계자였지만, 김치양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김치양은 몇 차례나 자객을 보내 왕순을 죽이려 했다. 왕순을 죽인 뒤에 자기 아이를 후계자로 만들려 한 것이다.
사랑과 정치를 구분하지 못한 '여왕'의 최후
▲ 고려 궁궐의 중심 공간인 회경전의 모습을 재현한 그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이다. 천추태후 시대에 고려의 최고 권력은 회경전이 아니라 김치양의 집에서 나왔다. | |
ⓒ 김종성 |
하지만 김치양의 계획은 번번이 실패했다. 왕순은 마치 드라마 주인공 같은 사람이었다. 드라마가 끝나지 않는 한 절대로 죽지 않는 주인공처럼 왕순은 김치양의 암살 음모를 번번이 피해 나갔다. 그러자 김치양은 생각을 바꿨다. 차기 왕을 죽일 게 아니라 차라리 지금 왕을 죽여야겠다고 결심했다. 목종을 죽이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 김치양 열전에 따르면, 목종이 병석에 누운 틈을 타서 김치양은 쿠데타를 준비했다.
왕순을 죽이려 할 때만 해도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이해관계는 일치했다. 하지만 태후의 아들인 목종을 몰아내는 것은 태후의 이익을 침해하는 일이었다. 여왕의 힘으로 권세를 잡은 김치양이 여왕을 위협하는 단계로까지 내딛게 된 것이다.
하지만 김치양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가 쿠데타를 준비한다는 정보가 새어나가자, 서북면 도순검사인 강조(康兆)가 지금의 평안도 지역에서 군대를 동원해 정변을 일으켰다. 개경을 장악한 강조는 김치양은 물론이고 목종과 천추태후까지 몰아냈다. 김치양은 자기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정권을 잡은 강조는 왕순을 임금 자리에 앉혔다. 바로 현종이다. 이때가 1009년, 훗날 강감찬을 기용해서 거란군을 몰아낸 현종이 이때 등장한 것이다. 강조에 의해 쫓겨난 목종은 귀양 가는 도중에 암살 당했고, 천추태후는 귀양살이 등을 하다가 1029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치양이 아니었다면 좀 더 오래 정치를 했을 태후는 김치양의 국정 농단 때문에 불명예스럽게 인생을 마치고 말았다.
천추태후는 큰 뜻을 품은 인물이지만, 사랑과 정치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연남에게 권력을 맡겨 내연남이 국정을 농단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이것은 정권의 와해로 이어졌다. 사적 관계가 공적 권력을 좀먹은 일은 이처럼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김치양은 천 년 전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도 최고 통치자와의 개인적 친분을 발판으로 정부의 공식 라인을 마비시키고 국정을 농단해 국가의 위기를 초래하는 인물은 나타날 수 있다. 그러면 유권자들의 선거로 만들어진 민주적 통치조직이 마비되고 국가가 몇몇 사람의 사조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초겨울 불조심을 잊지 말아야 하듯이, 자나 깨나 이런 인물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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