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 매년 이날이 오면 나는 좀 생각이 많아진다. 이날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역사적인 날이다.
1909년 같은 날 안중근 의사는 만주 하얼빈 역에서 한반도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의 심장을 향해 총을 쏘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명치유신(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다. 물론 일본이 군국주의화 되면서 그 총부리를 한반도와 중국으로 돌리는 데 크나큰 역할을 한 이도 그다. 안 의사는 그를 역사의 이름으로 처단함으로써 동양의 평화를 회복하려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저세상으로 떠났지만, 일본의 군국주의 물결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토가 그 물결을 타는 배의 선장이긴 하였지만, 당시 일본이라는 거함에는 이토를 대신할 수 있는 이토의 아바타들이 수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1979년 같은 날, 서울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그가 절대적으로 충성을 맹세해 왔던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쏘았다. 박정희는 그렇게도 총애하던 김재규의 손에 운명했다. 이 장면은 마치 카이사르가 총애하는 부르투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과 오버랩된다.
박정희와 카이사르가 닮은 점
박정희는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민주당 정부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극도의 무질서를 바로 잡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시절의 운은 그에게 있었던지 쿠데타는 성공하여 마침내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1969년 3선개헌을 통해 영구집권의 기반을 닦더니만, 드디어 1972년 유신헌법을 만들어 사실상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 선출을 국민 직선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대의원 선거로 바꾸어 버렸다. 그 대의원 선거는 말이 선거지 민주주의 선거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이 간선제 선거로 두 번에 걸쳐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모두 전체 대의원의 99%의 찬성을 받아 대통령이 되었다. 1972년 유신헌법이 만들어진 다음, 그 해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투표 2359명, 찬성 2357표, 무효 2표로 당선되었다. 1978년 두 번째 선거에서는 투표 2578명, 찬성 2577표, 무효 1표로 당선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국회의원 3분의 1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았는데(이들이 국회 내에서 만든 원내교섭단체가 유정회였음) 이들은 대통령이 추천하는 인물들이었으니, 사실상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로써 대통령을 견제해야 할 의회는 완전히 대통령의 거수기로 전락해 버렸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의 정수를 600명에서 900명으로 늘리고, 그 늘어난 원로원 의원의 임명권을 자신이 행사한 것과 매우 흡사하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임종을 맞이했고, 사망 직전 10·26이 터졌다. 박 대통령을 숭모하는 사람들은 그의 삶이 어쩜 카이사르와 비견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둘의 삶을 비교하면 의외로 많은 부분이 겹치기 때문이다. 한국의 근대화를 이루었다고 하는 박정희, 로마제국의 초석을 쌓은 카이사르, 이 둘은 모두 역사에 뚜렷한 명암을 남긴 채 비명에 갔으니 그런 생각도 무리는 아니다.
박정희는 자신을 추종하는 일단의 군인들을 대동하고 한강을 넘어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것으로 정권을 잡았다. 카이사르는 그를 지지하는 군단과 함께 루비콘 강을 넘어 로마에 들어왔고, 정적을 일소한 다음 제국의 1인자가 되었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만들어 종신 대통령으로의 길을 열었고 국회를 거수기로 만들었다. 카이사르는 제국의 1인자가 된 후 종신 독재관이 되었고, 원로원을 무력화시켜 사실상의 황제가 되었다.
박정희는 자신이 총애하는 부하 김재규의 총에 의해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 카이사르는 그가 아들이라고까지 했던 부르투스 일파의 칼에 의해 절명했다.
박정희와 카이사르, 이 한 가지는 달랐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있어 적어도 한 가지는 완전히 달랐다. 카이사르는 정적의 생각을 인정했다. 그들이 자신의 생각을 갖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인정했다. 다음 말을 한 번 음미해 보자. 카이사르가 키케로에 보낸 편지 일부다.
"내가 석방한 사람들이 다시 나한테 칼을 들이댄다 해도, 그런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는 않소. 내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거요. 따라서 남들도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오."(<로마인이야기> 5권 29쪽)
박정희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 자신의 생각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철저히 응징했다. 긴급조치를 남발하며 정권을 반대하는 어떤 사람도 용납하지 않았다. 박정희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아무것도 없었다. 감옥에 가든지 급기야는 죽음으로 내몰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적 김대중은 피납되어 현해탄(대한해협)에서 수장 직전에 살았고, 오랜 기간 박정희에 도전했던 장준하는 어느 날 산 속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정권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은 재판이라는 이름 하에 죽어갔다. 이름하여 사법 살인이다. 지난 40년간 인구에 회자된 인혁당 사건을 보라. 유신정권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고문받으면서 사건은 과장 조작되었다. 법원 확정판결이 난 지 단 18시간 만에 8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렇지만 30년 후 사건의 진상은 밝혀졌고 모두 무죄를 받았다. 권위주의 시대가 우리에게 준 공포치고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김재규는 더 이상 민주주의가 한 독재자에 의해 유린당하는 것을 볼 수 없어 유신의 심장부인 박 대통령을 쏘았다고 한다. 이는 마치 부르투스 일파가 로마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카이사르의 심장을 찔렀다는 것과 흡사하다.
하지만 그 암살의 목적은 김재규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카이사르를 살해하였지만 그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시작된 화려한 황제정을 부르투스가 막지 못한 것처럼.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은 민주주의의 회복으로 바로 연결되지 못했다. 또 다른 권력의 화신 전두환의 출현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그 뒤에도 십수 년을 기다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을 요구하고 나서야 우리 앞에 나타났다.
1909년 같은 날 안중근 의사는 만주 하얼빈 역에서 한반도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의 심장을 향해 총을 쏘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명치유신(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다. 물론 일본이 군국주의화 되면서 그 총부리를 한반도와 중국으로 돌리는 데 크나큰 역할을 한 이도 그다. 안 의사는 그를 역사의 이름으로 처단함으로써 동양의 평화를 회복하려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저세상으로 떠났지만, 일본의 군국주의 물결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토가 그 물결을 타는 배의 선장이긴 하였지만, 당시 일본이라는 거함에는 이토를 대신할 수 있는 이토의 아바타들이 수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1979년 같은 날, 서울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그가 절대적으로 충성을 맹세해 왔던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쏘았다. 박정희는 그렇게도 총애하던 김재규의 손에 운명했다. 이 장면은 마치 카이사르가 총애하는 부르투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과 오버랩된다.
박정희와 카이사르가 닮은 점
박정희는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민주당 정부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극도의 무질서를 바로 잡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시절의 운은 그에게 있었던지 쿠데타는 성공하여 마침내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1969년 3선개헌을 통해 영구집권의 기반을 닦더니만, 드디어 1972년 유신헌법을 만들어 사실상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 선출을 국민 직선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대의원 선거로 바꾸어 버렸다. 그 대의원 선거는 말이 선거지 민주주의 선거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이 간선제 선거로 두 번에 걸쳐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모두 전체 대의원의 99%의 찬성을 받아 대통령이 되었다. 1972년 유신헌법이 만들어진 다음, 그 해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투표 2359명, 찬성 2357표, 무효 2표로 당선되었다. 1978년 두 번째 선거에서는 투표 2578명, 찬성 2577표, 무효 1표로 당선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국회의원 3분의 1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았는데(이들이 국회 내에서 만든 원내교섭단체가 유정회였음) 이들은 대통령이 추천하는 인물들이었으니, 사실상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로써 대통령을 견제해야 할 의회는 완전히 대통령의 거수기로 전락해 버렸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의 정수를 600명에서 900명으로 늘리고, 그 늘어난 원로원 의원의 임명권을 자신이 행사한 것과 매우 흡사하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임종을 맞이했고, 사망 직전 10·26이 터졌다. 박 대통령을 숭모하는 사람들은 그의 삶이 어쩜 카이사르와 비견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둘의 삶을 비교하면 의외로 많은 부분이 겹치기 때문이다. 한국의 근대화를 이루었다고 하는 박정희, 로마제국의 초석을 쌓은 카이사르, 이 둘은 모두 역사에 뚜렷한 명암을 남긴 채 비명에 갔으니 그런 생각도 무리는 아니다.
박정희는 자신을 추종하는 일단의 군인들을 대동하고 한강을 넘어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것으로 정권을 잡았다. 카이사르는 그를 지지하는 군단과 함께 루비콘 강을 넘어 로마에 들어왔고, 정적을 일소한 다음 제국의 1인자가 되었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만들어 종신 대통령으로의 길을 열었고 국회를 거수기로 만들었다. 카이사르는 제국의 1인자가 된 후 종신 독재관이 되었고, 원로원을 무력화시켜 사실상의 황제가 되었다.
박정희는 자신이 총애하는 부하 김재규의 총에 의해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 카이사르는 그가 아들이라고까지 했던 부르투스 일파의 칼에 의해 절명했다.
박정희와 카이사르, 이 한 가지는 달랐다
▲ 19세기 칼 폰 필로티가 그린 카이사르의 최후 | |
ⓒ 위키피디아 |
그러나 두 사람에게 있어 적어도 한 가지는 완전히 달랐다. 카이사르는 정적의 생각을 인정했다. 그들이 자신의 생각을 갖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인정했다. 다음 말을 한 번 음미해 보자. 카이사르가 키케로에 보낸 편지 일부다.
"내가 석방한 사람들이 다시 나한테 칼을 들이댄다 해도, 그런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는 않소. 내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거요. 따라서 남들도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오."(<로마인이야기> 5권 29쪽)
박정희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 자신의 생각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철저히 응징했다. 긴급조치를 남발하며 정권을 반대하는 어떤 사람도 용납하지 않았다. 박정희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아무것도 없었다. 감옥에 가든지 급기야는 죽음으로 내몰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적 김대중은 피납되어 현해탄(대한해협)에서 수장 직전에 살았고, 오랜 기간 박정희에 도전했던 장준하는 어느 날 산 속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 유신시대 대표적 사법살인으로 불린 인혁당 사건은 30년이 지난 뒤 무죄가 되었다. 그러나 8명의 주검은 돌아오지 못했다. | |
ⓒ 동아일보/한겨레 PDF |
정권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은 재판이라는 이름 하에 죽어갔다. 이름하여 사법 살인이다. 지난 40년간 인구에 회자된 인혁당 사건을 보라. 유신정권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고문받으면서 사건은 과장 조작되었다. 법원 확정판결이 난 지 단 18시간 만에 8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렇지만 30년 후 사건의 진상은 밝혀졌고 모두 무죄를 받았다. 권위주의 시대가 우리에게 준 공포치고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김재규는 더 이상 민주주의가 한 독재자에 의해 유린당하는 것을 볼 수 없어 유신의 심장부인 박 대통령을 쏘았다고 한다. 이는 마치 부르투스 일파가 로마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카이사르의 심장을 찔렀다는 것과 흡사하다.
하지만 그 암살의 목적은 김재규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카이사르를 살해하였지만 그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시작된 화려한 황제정을 부르투스가 막지 못한 것처럼.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은 민주주의의 회복으로 바로 연결되지 못했다. 또 다른 권력의 화신 전두환의 출현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그 뒤에도 십수 년을 기다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을 요구하고 나서야 우리 앞에 나타났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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