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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적’ 국정원…‘조작의 추억’

등록 : 2014.03.11 15:38 수정 : 2014.03.11 15:55

 

한겨레가 1998년 3월 입수한 안기부 내부문건 ‘오익제 편지사건 언론보도 실태 및 후속 대책‘.

매 정권마다 정권 유지의 충직한 하수인으로 기능
편지 조작부터 트위터 조작까지 ‘어둠의 역사’

한국의 정보기관은 독재 정권의 온존과 유지를 위한 충직한 하수인이었다. ‘5·16 쿠데타’ 직후인 1961년 6월10일 창설된 중앙정보부(중정), ‘12·12 군사 반란’ 직후인 1981년 1월1일에 신설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그랬다. 간첩 사건 조작으로 공포감을 조성해 분단 상황을 고착시키고 검열을 통해 언론에 재갈을 물림으로써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을 사전에 제압했다. 정권을 유지하는 데 이보다 더 효과적인 통치수단은 없었다.

군부독재가 비로소 종식됐다는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안기부의 과거 작태는 사그라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문민정부가 독재세력과 야합의 산물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안기부는 ‘세 살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199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디제이피 연합을 통해 김대중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커지자 안기부는 ‘조작 사건’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꺼냈다. 안기부는 대선 직전인 1997년 12월6일, 월북한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이 같은해 10월 김대중 후보에게 보냈다는 편지를 공개했다. 편지에는 “선생님께 유리한 대선정국을 놓고 이북의 여러 인사들도 후광 선생의 대승을 기대하고 있음을 감지한 바 있습니다. 대선에서 필승하시고 다가오는 통일의 그날 반갑게 상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있었다. 북한이 김 후보의 승리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취지였다. 12월11일에는 재미동포 윤홍준씨가 중국 베이징에서 “김대중 후보가 북한의 김정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했다. 13일에는 재미동포 김영훈 목사와 임춘원 전 의원 등이 일본 도쿄에서 “김병식 북한 사민당 중앙위원장이 김대중 후보한테 보내는 편지를 받았다”며 이를 공개했다. 대선 이틀 전인 16일에는 윤씨가 서울에서 같은 내용의 기자회견을 한 뒤 곧바로 출국했다. 이는 김대중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한 안기부의 거대한 공작이었다. ‘김병식 편지’를 베이징에서 받아온 사람은 안기부 공작원 흑금성이었고, 재미동포 윤홍준씨에게 거짓 기자회견을 사주한 것도 안기부였다는 사실이 검찰 수사에서 밝혀진 것이다.

안기부의 조직적 훼방을 뚫고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은 안기부의 이름을 국가정보원(국정원)으로 바꾸고 개혁 의지를 천명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국정원 감청 담당 부서인 8국(과학보안국)은 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R2)와 이동식 휴대전화 감청장비(CAS)로 국내 주요인사들의 통화를 도청했고 이를 ‘통신첩보’라는 이름으로 상부에 보고했다. 국정원의 도청은 안기부 미림팀의 유산이었다. 미림팀은 서울의 이름난 한정식집 지배인·종업원 등 ‘망원’에게서 주요 인사들의 예약 상황을 전해 듣고 사전에 도청기를 설치해 대화를 엿들었다. 정권이 바뀌고 미림팀은 해체됐지만 국정원은 휴대전화를 도청하기 시작했다.

국정원의 도청이 세상에 알려진 건, 19세기 영국의 러다이트(기계파괴) 운동을 연상시킨다. 1998년 미림팀이 해체되면서 일자리를 잃은 공운영 전 팀장은 이에 앙심을 품고 도청 테이프를 재미동포 박인희씨에게 넘긴다. 삼성그룹의 추악한 정관계 로비 내용이 담긴 테이프였다.
2005년 8월5일 오전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에서 열린 `옛 안기부 불법 도청 사건 대국민 사과 및 중간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 김승규 국정원장과 서대원 1차장, 최준택 3차장(오른쪽부터)이 이상업 2차장의 중간수사 결과 발표를 듣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박씨는 이를 미끼로 삼성에 돈을 요구했고 우여곡절 끝에 2005년 7월, 언론에 공개되기에 이른다. 불과 3개월 전 “국정원의 휴대전화 도청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검찰은 재수사에 나서 안기부와 국정원의 도청 사실을 밝혀내야 했다.

참여정부에서 이명박 정부 초·중반 때까지 국정원의 큰 과오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매우 은밀하고 조용하게 ‘신개념 사고’를 치고 있었다. 심리전이라는 이름으로 사이버상에서 총선과 대선에 노골적으로 개입한 것이다. 박근혜 후보는 추어올리고 문재인·안철수·이정희 후보는 깎아내렸다.
불법 선거운동 의혹을 받고 있는 국정원 여직원 김 모 씨가 2013년 1월4일 오후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수서경찰서에 들어서고 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1997년 12월 안기부가 손편지를 동원한 아날로그적 여론조작을 꾀했다면, 2012년 국정원의 선거개입은 ‘좋아요’ 버튼 누르기와 ‘무한 트윗’ 형태로 진화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무리수였을까. 새누리당은 정권을 연장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은 지난해 6월24일, 2007년에 있었던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전격적으로 공개했다. 여야가 국정원의 선거개입 국정조사에 합의한 직후에 감행한 일이었다. 국정원이 위기에 처하자 국면전환을 위해 외교 관례를 무시하고 국익을 훼손한 폭거였다.
남재준 국정원장이 2013년 12월12일 오전 국회 국가정보원개혁특위에 참석, 정세균 위원장과 악스를 하고 있다. 김경호기자 jijae@hani.co.kr
남재준 국정원장은 “야당이 자꾸 공격하니까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보기관의 명예를 훼손한 건 야당이 아닌 국정원 자신이었다.

국정원의 선거개입 재판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국정원은 다시 뉴스의 중심에 섰다. ‘서울시 조작 간첩 사건’ 때문이다. 위기를 모면하려던 국정원의 저열한 거짓말은 ‘국정원 협력자’의 혈서와 유서를 당해내지 못했다. 앞서 남 원장은 국정원 개혁방안이 논의되던 지난해 12월 국회 정보위원회에 나와 ‘대공수사권’을 “확실히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국정원이 가장 중요한 본령으로 꼽은 대공수사권이 생사람을 잡을 정도로 남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가 서울시 간첩 조작 사건이다. 기술은 진화하고 있지만 국정원은, 손쉽게 간첩 사건을 조작해내던 1970~80년대의 중정·안기부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민의를 왜곡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한겨레 신문

 

Posted by 어니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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