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지상주의에 빠진 한국 골프계, 안선주가 던진 메시지<2>
일본에서 5년 동안 상금왕 2회, 신인왕 수상과 통산 16승을 거두며 '기록'을 만들고 있는 안선주.(사진=이영미) |
2014시즌 일본프로여자골프(JLPGA) 투어 한국 선수 우승 기록이다. 4월 야마하 레이디스오픈 안선주 우승, 4월 스튜디오앨리스 레이디스오픈 이에스더 우승, 5월 호켄 마도쿠치 레이디스오픈 이보미 우승, 5월 주쿄TV·브리지스톤 레이디스오픈 안선주 우승, 6월 산토리 레이디스오픈 안선주 우승, 6월 니치레이 레이디스 신지애 우승, 그리고 6월 29일, 어스-몬다민컵 연장 접전 끝에 안선주 준우승. 7월 전까지 JLPGA 투어에서 한국 여자 골프 선수들이 거둔 총 6승 중 3승은 안선주의 몫이었다. 안선주가 2010년 일본 진출 후 지금까지 JLPGA에서 거둔 승수는 16승. 그동안 벌어들인 상금 총액만 5억엔(한화 50억 4000만 원)을 돌파했다. 5억엔 돌파는 JLPGA 사상 최단 기간에 이뤄진 결과물이다.
2006년 KLPGA 정규 투어를 시작한 안선주는 데뷔 첫 해 1승을 비롯해 2010년 일본 진출 전까지 7승을 수확, 신지애와 함께 가장 기대되는 선수로 성장했다. 그러나 외모지상주의가 팽배한 국내 골프계에서 스폰서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그는 과감히 한국을 떠나 일본여자골프계를 두드렸다. 일본에선 예쁘지 않아도 실력만으로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고, 현재 일본 5개의 기업으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안선주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성형 수술을 권했던 일부 한국 기업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은 (한국을) 떠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잠시 휴가를 받아 한국에 들어온 안선주를 만났다.
아빠의 뒷바라지 없이 일본에서의 홀로서기
일본 투어 중인데 일부러 휴가를 낸 건가.
“그게 미국이 아닌 일본에서 투어 생활하는 선수들의 장점 아니겠나. 다음 투어까지 6일 정도의 시간이 있어 엄마, 아빠 얼굴 보려고 잠깐 들어왔다. 한국에 오면 1분 1초가 아깝다. 짧은 시간 동안 가족들과 친구, 선배들도 만나고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스케줄을 빡빡하게 채워서 보내고 간다.”
2008년 LPGA 퀄리파잉스쿨에서 수석으로 통과한 후 부상으로 본선대회를 포기하고 귀국한 적이 있었다. 이후 다시 도전하지 않고 일본으로 방향을 튼 이유가 무엇인가.
“미국에서 퀄리파잉스쿨 예선대회를 치르며 LPGA 투어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실감할 수 있었다. 내 삶의 방식과 그곳 투어 생활과는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외동딸이다. 미국은 부모님이 계시는 한국과 너무 멀었다. 아빠가 왔다 갔다 하신다고 해도 12시간 넘게 타는 비행기 이동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한국이랑 가까운 일본을 택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간 일본 생활이 처음엔 어떠했나.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골프를 배우기 시작한 이래 ‘안선주=아빠’의 인생은 함께 맞물렸다. 매일 같이 움직이다보니 아빠랑 말다툼 벌이는 게 다반사였다. 그런 가운데 맞이한 일본행은 자유와 책임감을 함께 짊어지게 했다. 무엇보다 아빠의 감시와 간섭 속에서 벗어나 홀가분했다(웃음). 아빠가 종종 일본을 방문하시긴 했지만, 24시간 함께 있는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외로움과 향수병으로 힘든 시간들 보냈다. 그러나 주위에 아무도 없다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골프 연습 밖에 없더라. 한국에서 투어 생활할 때는 연습 안 하는 골퍼로 유명했다. 그랬던 내가 밥 먹고 잠 자는 시간 외엔 모든 시간을 골프에 쏟았다. 큰 단점으로 꼽힌 퍼팅 연습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 단점이 지금은 장점으로 실력 발휘를 하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 하지 않는 투어 생활이 정신은 자유로워질지언정, 몸은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모든 걸 직접 챙겨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살짝 우울증 증세가 나타나기도 했다. 성적이 나오지 않을 때는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한없이 슬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랑 떨어져 지내기로 한 건 정말 잘 한 선택이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골프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성적이 안 좋아도 옆에서 눈치 볼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 반면에 그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나 혼자 감당하는 게 버거웠다. 그럴 때마다 아빠가 그리웠다.”
골프 선수들의 아버지를 ‘골프 대디’라고 부른다. 그런데 딸이 독립 선언을 하면 아버지는 실업자 신세가 된다. 더 이상 딸을 쫓아다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절대 공감하는 부분이다. 난 홀로서기를 통해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을 살고 있지만, 나만 바라본 아빠는 졸지에 ‘직업’을 잃고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 만약 나한테 아빠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안선주도 없었을 것이다. 아빠가 여기까지 이끌어주셨기 때문에 일본에서 최고의 성적을 내며 투어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골프 선수들한테 홀로서기는 꼭 필요한 과정이다. 한국에 있을 때의 난, 내가 원하는 골프보다 아빠가 원하는 골프를 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신지애의 그늘에 가린 2인자 생활
한국에서 프로 생활할 때, 줄곧 신지애와 비교 대상이 되었다. 1인자와 2인자로 말이다. 당사자로선 상당히 불편한 시선이었을 텐데.
“2인자가 있어야 1인자도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존재했기에 지애가 더 빛이 났다고 믿는다. 물론 그 당시엔 굉장히 속상했다. 나이가 스무 살 정도 되다보니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기보단 무조건 이기고 싶었다. 지애가 받는 인기와 관심이 부러웠다. 그래서 더 독해지고 강해졌다. 그땐 지애의 존재가 벽처럼 느껴졌지만, 지금은 지애 덕분에 더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같이 투어 생활할 때, 신지애와 안선주를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들었다.
“나를 지애로, 지애를 나로 알고 사인요청을 해온 팬들이 많았다. 외모도 체격도 비슷하다보니 골프장 갤러리들도 헷갈려 하셨다. 지애랑 놀이공원에 놀러 다닌 적이 많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내 앞으로 다가와 ‘신지애 선수 팬입니다’라고 인사를 하더라. 그럴 땐 그냥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일일이 아니라고 대답하기도 힘들었다.”
항간에는 신지애가 미LPGA에 진출했기 때문에 안선주가 신지애를 피해 일본을 택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미국 무대에 도전을 했지만, 퀄리파잉스쿨에 수석으로 합격해 놓고도 거리상의 부담과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포기했던 것이고, 일본은 그런 부담을 덜고 투어에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지애도 미국이 아닌 일본에서 투어 생활을 한다. 미국에선 지애가 최고의 성적과 커리어를 기록했지만, 일본에선 내가 한국인 최초로 상금왕에 올랐다. 인생은 돌고 도는 것 같다.”
일본 데뷔 첫 해 신인왕과 상금왕을 동시에 수상했다. 이듬해엔 또 다시 상금왕에 올랐다. 일본 진출 5년 째 만에 벌써 16승을 거둔 데 대해 스스로 평가를 해본다면?
“사실 일본에 가자마자 그런 엄청난 성적과 수상을 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골프만 파고 살았던 데 대한 보상인 것 같았다. 데뷔 2년차까지 상금왕에 오르며 전성기를 구가했는데, 그 후 2년여 동안 약간 숨고르기를 했고, 올시즌 다시 스피드를 내고 있는 중이다. 데뷔 후 해마다 1승 이상은 성적을 냈다. 단, 데뷔 첫 해부터 워낙 좋은 성적을 올리며 승승장구했던 터라 우승 횟수가 적었던 2012년, 2013년이 더 크게 부각됐다고 본다.”
일본투어에서 20승을 거두면 한국 투어의 풀시드권을 받게 되지 않나. 그렇다면 4승 밖에 남지 않았다.
“이 말을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내 꿈은 정상에서 은퇴하는 것이다. 남들이 날 기억하고 있을 때, 골프 잘 치는 안선주로 기억해주실 때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머지 않아 은퇴를 하겠다는 얘기인가.
“아빠한테 말씀 드렸다. 서른 살까지만 투어 생활을 하고, 이후에는 취미로만 골프를 하고 싶다고. 중2부터 본격적인 골프를 시작했으니 지금까지 난 인생의 절반을 골프만 하고 살았다. 더 이상 승부의 세계에 발목 잡혀 또 다른 인생을 놓치며 살고 싶지 않다. 인생의 반을 골프에 헌신했으면 충분히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 예쁠 때 떠나고 싶다. 돈에, 명예에 휘둘려 떠날 시기를 놓친다면 정말 서글플 것 같다.”
어느 골퍼가 서른 살에 은퇴할 계획을 세울까. 안선주는 자신의 특별한 인생을 설계하고 있었다.(사진=KLPGA 제공) |
서른 살, 정상에서 은퇴할 계획!
올해 나이가 우리나라 나이로 스물여덟 살이다. 서른 살까진 2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만 나이로 해서 앞으로 3년 동안만 투어 생활을 할 것이다. 은퇴 마지막 해에 상금왕에 다시 한 번 더 오르고 그만둔다면 멋질 것 같다.”
아버지의 반대가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아빠도 처음에는 상당히 아쉬워하셨지만, 내 고집을 꺾지 못한다는 걸 아셨고, 아빠도 내가 좀 더 편하게, 여자로서의 인생도 살기를 바라셨다. 골프하다보면 사생활이 없다. 이성을 만날 시간도 여유도 없다. 투어생활하면서 결혼하게 되면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 그러다 좋지 않은 결과를 안게 되는 선배들도 봤다. 골프가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상에 있을 때 내려오려고 하는 것이다. 내 주위의 선배들은 이런 얘길 들으면 나에게 ‘미쳤다’라고 말한다. 곧 마음이 바뀔 거라면서. 그러나 서로의 가치관이 다를 뿐이다. 골프에 올인하는 선배들도 있지만, 난 내 인생을 골프로만 채우고 싶지 않다. 지난 14년간 성적을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미친 듯이 달려왔다. 이젠 그런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 은퇴 후 부모님 모시고 여행도 다니고, 친구들과 맛집 찾아다니며 맛있는 것도 먹고, 기회되면 골프 레슨도 하면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평범한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싶다. 진정한 효도는 골프 잘 치는 것 보다 내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아직 어린 골프 선수한테 이런 내용의 얘기를 들어본 건 기자 생활하고 처음 있는 일이다. 솔직히 신선한 충격이다.
“아빠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 아니셨다. 작은 가게를 운영하시며 나를 이 정도의 골프선수로 만들려다보니 빚도 많이 지셨고,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으셨다. 일본에 갔을 때 어떻게 해서든 아빠가 진 빚을 갚아 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그 빚을 다 갚았고, 집도 한 채 마련했다. 그럼 된 거 아닌가.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다. 내가 게으르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벌 수 있다고 자신한다. 앞으로 3년 동안 바짝 당겨서 승수도 챙기고, 경제적인 자립도 해나가면서 진정한 홀로서기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무엇보다 골프에 대한 스트레스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웃음).”
한국을 떠나 일본 투어에 정착한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서 한국 기업으로부터 후원을 받지 못한 것도 포함돼 있다고 들었다.
“(한숨을 쉬며) 외모지상주의라는 말 들어봤나? 여자 골프계에선 성적보다 외모가 훨씬 더 중요했고, 스폰서를 받으려면 일단 얼굴이 예뻐야 후보군에 올랐다. 한국에선 후원을 약속했던 기업이 하루 아침에 약속을 백지화 시킨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성형을 강요한 기업도 있었다. 골프를 선수로 안보고 여성으로 보는 기업들의 시각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난 아시다시피 예쁘지도 않고, 날씬하지도 않고, 섹시하지도 않다. 그런 사람은 골프를 치면 안 되는 것인가. 이런 인식이 팽배한 한국에서 골프 선수로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의 기업들은 내 외모가 아닌 골프에 집중해줬다. 성적을 냈고, 팬들을 대하는 내 태도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지금은 의류 포함해서 6개의 일본 회사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다.”
안선주는 인터뷰 내내 야무진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전했다. 신념과 가치관이 굉장히 명확했다. 그래서 그가 서른 살에 은퇴하겠다는 얘기에 감동 먹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일본에서 거둔 16승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우승으로 지난 해 8월, CAT 레이디스에서 시즌 첫 우승을 거뒀을 때를 꼽았다. 그 이유로 또 다시 아버지 안병길 씨 얘기를 꺼냈다.
“아버지가 지난해 나의 성적 부진으로 인해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으셨다. 그러다 결국 앓아누우시기까지 하셨다. 일본에 있다 보니 한국에 계시는 아빠를 병원에 모시고 가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아빠가 병원에 가는 걸 극히 싫어하셨다. 그래서 대회 날 아침, 전화로 아빠가 병원에 안 가면 나도 골프를 그만 두겠다고 화를 냈더니 그 다음 날 병원에 가겠다고 약속을 하시더라. 대회 내내 울면서 골프를 친 것 같다. 행여 아빠한테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어쩌나 싶어 골프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우승컵을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8월 돼서야 맞이한 시즌 첫 우승이 기뻤고, 그 우승으로 인해 스트레스 받았던 아빠가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병원 검진을 받으러 다니실 거라는 생각이 교차하면서 펑펑 눈물을 쏟았던 것 같다.”
안선주는 공개하길 꺼렸지만, 그는 일본 진출 전부터 자신이 받은 상금 중에서 일부를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으로 내놓고 있었다. 골프를 시작하기 전 테니스 선수로 활동했던 이력을 잊지 않고, 경기도 지역의 테니스 유망주를 돕는 데도 앞장 서고 있다. 이에 대해 그는 “난 비록 빚을 지면서 골프를 배웠지만, 그렇게라도 뒷바라지 해주신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에 골프 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돕는 아이들은 부모님의 지원을 받지 못하거나 돈이 없어서 운동을 포기할 뻔 했던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큰 도움이 되진 않아도, 그들에게 어려움을 딛고 공부하거나 운동할 수 있는 작은 디딤돌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다”는 마음을 나타냈다.
2시간이 넘도록 인터뷰를 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안선주가 기자에게 준 메시지는 크고 강했다. 다음은 안선주라는 골프 선수의 ‘그릇’이 제대로 느껴질 만한 내용이다.
“난 한국인 최초로 일본에서 상금왕에 올랐고, 고 구옥희 프로님이 일본에서 첫 우승을 거둔 이래 25년 만에 100승을 달성한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선배님들이 힘들게 닦아 놓은 길에 난 그저 숟가락만 얹었을 뿐이다. 그래서 더 이상 욕심이 없다. 미련도 없다. 또 다른 후배들이 활약할 수 있도록 마무리 잘해서 3년 후에 일본 투어를 매듭지을 것이다.”
한국에서 투어 생활하며 외모 비하로 커다란 좌절감을 맛봤던 안선주. 그에게 일본 투어는 또 다른 기회의 장이었다.(사진=JLPGA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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