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25 20:35수정 : 2014.06.26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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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16일 발생한 세월호 침몰사고에서 생존한 경기도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25일 오전 71일 만에 등교하다 학교 정문 근처에서 생존자·희생자 부모들과 부둥켜안고 있다. 안산/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
[곽병찬 대기자의 현장칼럼 창]
국민을 열번 스무번 속일 수 있다고 생각 말라
지금 이 나라 병통은 그렇게 믿는 대통령이다
조선의 대과 마지막 관문은 왕이 묻고 예비합격자가 대책을 제시하는 전시다. 광해군 3년(1611년) 증광시에서 광해군은 이런 시제를 내놓는다. “전란을 겪고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들을 소생시키는 것이 지금 당장 시급한 일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임숙영은 전제, 세제 등에 대해 언급한 뒤 이렇게 되묻고는 답한다. “나라의 진짜 큰 우환과 조정의 병폐에 대해서는 문제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왜 마땅히 물어야 할 것은 묻지 않으십니까.” “전하께서 마땅히 먼저 근심해야 할 것은 궁중의 법도가 엄하지 않은 것, 언로가 열리지 않은 것, 공평하고 바른 도리가 행해지지 않는 것, 국력이 쇠퇴한 것입니다.” 요컨대 시급한 나랏일은 임금의 잘못을 고치는 것이요, 임금의 잘못이 곧 나라의 병통이라는 것이었다.
문창극씨가 일제 관변학자들처럼 ‘이조’라고 부르며 조롱하고 개탄했던 조선조 왕들은 입신의 첫발을 뗀 신출내기 유생들에게까지 몸소 시무책을 구하며 시대와 소통하려 했다. 신출내기들도 제 의견을 곧이곧대로 개진해야 했다. ‘솔직히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죽기를 각오하고 말씀드립니다’라는 말로 책문이 끝을 맺는 건 그런 까닭이었다. 지금도 시대를 넘어 울림을 주는 건 그런 진실한 소통 덕분이었다.
문씨가 거짓된 말로 사퇴의 변을 삼을 때, 박근혜 대통령은 그와 똑같은 거짓말로 저의 잘못을 떠넘기려 했다. 국회가 청문회를 열지 않아 유감이라는 것이었다. 중앙아시아 순방 중인 지난 18일, 박 대통령은 청문 요청서를 국회에 보낼지 여부는 귀국해서 결정하겠다고 민경욱 대변인을 통해 밝혔다. 인사청문회는 정부가 요구하면 하지 않을 수 없는 게 국회다. 왕조에서도 국왕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진실과 성실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지금 이 나라의 대통령과 총리 후보자는 한날한시에 같은 내용의 거짓말을 입에 올렸다.
중종 2년 증광시 전시에서 중종은 이런 시제를 냈다. “‘처음에는 착하지 않은 이가 없으나 끝까지 착한 이는 적다’는 말이 있다. 내가 오로지 걱정하는 것은 끝마침을 잘하지 못할까 하는 것이다.” 이에 충재 권벌은 이런 책문을 올렸다. “…쉬울 때 어려움을 생각하며, 작은 일에서 시작해 큰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시작할 때는 마칠 때를 생각해야 하고, 시작을 잘했으면 끝마무리도 잘해야 합니다. 이 마음을 처음이나 끝이나 한결같이 유지한다면 오래도록 나라가 잘 다스려져 편안해질 것입니다.”
충재는 기묘사화 때 숙청당하는 사림파를 지키려다 관직에서 쫓겨났다. 15년 뒤 다시 중용돼 인종 승하 후 원상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을사사화 때 사생결단으로 문정왕후에게 윤임 등의 신원을 주장했다가 다시 쫓겨났고, 결국 유배지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끝까지 한마음을 지켰다. 그와 정치노선이 달랐던 송시열조차 “공이 나아가 보여준 기상과 절의는 푸른 하늘의 밝은 태양보다 밝고 뛰어났다”고 칭송했다.
이번 개각은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정부의 무책임과 무능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적폐 운운하며 국가개조라는 슬로건을 내세울 때, 이미 저의 잘못을 떠넘기려는 의도가 분명했지만, 너무나 엄청난 참사였던 만큼 개각 또한 국민을 실망시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돈과 시장 중심에서 사람과 공동체 중심으로, 천박한 성공신화에서 품격 있는 가치를 소중히 하는 사회로 전환하는 시늉이라도 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또다른 참사였다.
굳이 개인의 적폐를 상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광신주의 신앙체계 속에서 힘과 돈을 숭배하고, 반인륜을 묵과한 총리 후보자를 비롯해 2기 내각의 새 면면은 그야말로 진실과 성실의 덕목을 비웃고 도덕을 조롱하는 것이었다. 제자의 논문을 가로채고, 표절을 밥 먹듯이 하고, 연구비를 가로채고, 허위 논문으로 승진하고, 군문에 있으면서 학교나 다니고, 민주주의 파괴를 옹호하고 인권유린을 정당화하고, 국가와 국민을 분열시키지 못해 안달 나고, 출세와 축재를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은 자들이었다. 새 내각은 새 부대가 아니라, 차라리 쓰레기통만 못하다.
그 까닭을 이 정권도 잘 알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비롯했으되, 오로지 참사를 지우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유병언과 가족을 희생양 삼아 국민적 분노를 진화하고, 기억을 지우는 데 온갖 무리를 다 저질렀다. 정작 중요한,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참사의 진상을 시야에서 가리기 위해 온갖 꾀를 냈다. 그들은 문씨가 월터 리프먼을 인용해 말했다고 했듯이, 대중을 선동과 조작의 대상으로만 간주했다. 남을 속이려면 저를 먼저 속여야 하는 법. 결국 이 정권은 세월호 참사를 기억에서 지워버렸고, 개각에는 세월호 참사가 없다. 그 결과 정부는 벌써 2개월째 표류하고 있다. 또다른 국민적 참사다.
박 대통령이 한마음을 오롯이 지키길 바라지는 않는다. 도대체 지켜야 할 마음이란 게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만은 부탁하고 싶다. 참극 혹은 비극을 기억하라. 세월호를 기억할 수 없다면 양친의 비극만이라도 기억하라. 국민을 열 번 스무 번 속일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이 나라의 병통은 그렇게 믿는 대통령이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