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두차례의 국무총리 후보 추천에 실패하자 돌연 이미 두달 전에 사표를 수리하겠다고 발표한 정홍원 현 총리를 유임하겠다고 밝혀 파문을 낳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민을 기만하고 조롱하고 있다는 비판과 함께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정치를 펴고 있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박 대통령은 26일 “세월호 사고 이후 국민들께 국가개조를 이루고 국민안전 시스템을 만드는 약속을 드렸다”며 “이를 위해 지금 시급히 추진해야 할 국정과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청문회 과정에서 노출된 여러 문제들로 인해 국정공백과 국론 분열이 매우 큰 상황”이라고 밝혔다고 윤두현 청와대 홍보수석이 이날 발표했다. 자신의 인사 실패 원인을 인사청문회 과정 탓으로 돌린 것이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고심 끝에 오늘 정홍원 국무총리의 사의를 반려하고 국무총리로서 사명감을 갖고 계속 헌신해 줄 것을 당부했다고 윤 수석은 전했다.
윤 수석은 “앞으로 청문회를 통해 새 내각이 구성되고 정부 조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정홍원 총리와 경제부총리, 교육부총리가 중심이 되어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비롯한 국정과제와 국가개조를 강력히 추진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동안의 인사 시스템에 대한 보강을 위해 청와대에 인사수석실을 신설하고 인사비서관과 인사혁신비서관을 두어 철저한 사전 검증과 우수한 인사의 발굴과 평가를 상설화하기로 했다고 윤 수석은 전했다.
이 같은 박 대통령의 발언은 정확히 두달 전 자신이 했던 발언 뿐 아니라 행정행위를 뒤집은 것이다. 지난 4월 27일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박근혜 대통령께서는 정홍원 국무총리가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한 것에 대해 수리하기로 했다”면서 “그러나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구조작업과 사고 수습으로 이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사고 수습 이후에 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발표했다. 사의를 수리하겠다는 결정은 웬만한 작은 조직에서도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이다. 사의를 수리하겠다고 대국민 발표를 한 이상 이는 행정행위로서의 의미를 갖는데, 지금와서 다른 이유를 들어 아예 반려한다고 말을 바꾼 것은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희언’을 일삼은 것이나 같다는 비난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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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문화가 있는 날을 맞아 간송문화전을 찾은 박근혜 대통령. 사진=청와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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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서조차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유은혜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변인은 26일 오전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다”며 “국민을 어쩌면 이렇게 기만하고 우롱할 수 있느냐”고 성토했다. 유 대변인은 “우리 역사상 이런 일이 처음있는 일”이라며 “사표를 수리하고 두 번이나 임명을 했다가 검증에 통과하지 못하자 옛날사람을 다시 기용한 것은 처음으로, 도저히 예측과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인사”라고 밝혔다.
유 대변인은 “세월호 참사 이후 달라진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며 흘린 박근혜 대통령의 눈물은 다 거짓말이었다”며 “세월호 희생자 가운데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해놓고 이제는 단 한 명도 이 정부에서는 책임지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같다”고 비판했다.
특히 정 총리는 국회 대정부 질문 때 나와서도 여러차례 ‘물러나는 총리’라면서 자신은 그만두는 총리라는 점을 강조해왔다. 유 대변인은 “이미 사표가 수리돼 두 차례 대정부 질의 때 물러난다고 기정사실화했던 정 총리를 다시 유임시키는 것은 청문회 피하기 위한 꼼수”라며 “절차적 문제는 없는지도 살펴볼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는 이미 사표를 수리하고, 이를 전제로 후임 총리후보를 두 차례나 검증하고 추천했기 때문에, 정 총리를 이번에 유임한 결정이 법적으로 유임이 아니라 재임명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정 총리 역시 인사청문 절차를 다시 거쳐야 한다는 논리가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유 대변인은 “정 총리 유임 과정에 절차적 하자가 없는 것인지 의문”이라며 “청문회 하지 않기 위해서인지, 인재풀 바닥이 나서인지 따져봐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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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세종시 정부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던 정홍원 국무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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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생긴 국정공백과 국론분열을 방치할 수 없어 이 같은 결정을 했다는 박 대통령의 주장은 전형적인 남탓이며 ‘유체이탈’ 결정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유 대변인은 “청와대가 이렇게 문제많은 사람을 추천해서 분열과 공백 낳게 해놓고 청문회 과정 탓을 할 수 있느냐”며 “인사수석실을 만들면 뭐하겠느냐.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 없이 물러나는 것으로 합의된 사람을 다시 총리로 쓰는 나라가 됐다”고 지적했다. 유 대변인은 “청문회를 하지 않고 7·30 재보선을 치르겠다는 것”이라며 “국민을 상대로 오기를 부리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세월호 참사 유족도 격한 반응을 내놨다. 김병권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 대표는 26일 오전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정홍원 총리는 사법처리가 돼야할 사람”이라며 “세월호 참사에 책임을 지는 모양으로 사의했지만 정 총리가 한 게 하나도 없다”고 성토했다.
참사 당시 진도에 내려온 정 총리와 면담을 했다는 김 대표는 “(사고 발생) 나흘동안 뭐했느냐고 물었지만 대안도 없고 말도 없고 자꾸 따지니까 이주영 장관에게 전화라고 하지 않나, 자질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이 결정해서 유임이 된게 맞느냐”고 되물으면서 “나라가 어떻게 갈려고 하는건지, 나라가 잘못돼 가고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세월호 참사 여야 국조특위 활동이 시작되는 판국에 책임져야될 당사자가 유야무야 유임되고 책임에 대해서는 나몰라라는 하는 게 아니냐”며 “정홍원 총리를 유임시키자고 추천한 사람도 사퇴해야 한다”고 비난했다.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는 정홍원 총리 유임 결정에 대해 의견을 모아 입장을 발표할지 논의하기로 했다.
인터넷 상에서도 박 대통령의 정 총리 유임 인사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최경영 뉴스타파 기자는 트위터를 통해 “세월호 참사는 누가 책임지시는 건지요”라며 “박 대통령 지금 국민 데리고 장난칩니까, 이렇게 무책임해도 되는 겁니까”라고 비난했다. 홍성규 통합진보당 대변인도 “식물총리 유임은 박근혜 인사의 종말”이라며 “수첩명단이 바닥났거나 아니면 ‘친일행각·논문표절·위장전입’ 등 범죄경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만이 남았거나 어떤 경우든 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 더 이상 인사는 못할 것이라는 ‘포기선언’”이라고 비판했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도 “인사청문회 통과할 사람 못 찾아 전임자 유임이라니 무능정권의 결정판, 말 그대로 방패막이 총리”라고 밝혔다. 한 누리꾼은 “정홍원 총리 사퇴자가 어느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침대에 있는 자신이 거대한 좀비총리로 변신했음을 발견했다”고 비꼬는 글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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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눈물 흘리던 모습. 사진=청와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