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04 14:04 수정 : 2013.11.04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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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3일 (현지 시각) 프랑스 파리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동포 오찬 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뉴시스 |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30
“39년 만에 박근혜 공주 다시 오다”라고 쓴 프랑스 언론
갈등과 분열 대신 메르켈의 ‘엄마 리더십’ 배워 오시길
지금쯤 프랑스 일정을 마치고 영국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겠죠. 영국에선 왕실이 초청한 외국 정상에 대해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직접 왕실 1호 마차에 함께 올라 버킹엄궁으로 안내한다고 합니다. 영국 왕실은 이런 국빈 초청을 1년에 두번밖에 하지 않는다니, 정상들로선 선망의 대상입니다. 우리의 경우 2004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당시 족벌 언론들은 ‘호화 외유’, ‘혈세 낭비’ 운운하며 노 대통령의 왕실 초청 방문을 깎아내리기 바빴습니다.
이번이 두번째라 하더라도 영국 왕실 초청의 의미가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무언가 각별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한국의 여성 대통령이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과 나란히 마차를 타고 가는 모습은 가부장체제의 권위주의 질서에 오랫동안 짓눌려온 우리 여성들에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이벤트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장면에서 특별히 궁금한 건 촌스럽게도, 마차에서 대통령이 어떤 패션을 선보일 것인지입니다. 여왕의 위엄·품격 그리고 노년의 격조를 자랑하는 엘리자베스 2세 옆에서, 어떤 품격을 뽐낼 것인지 말입니다. 지금까지 외국 순방에서 패션으로 눈길을 모았던 터였으니, 특별히 저만의 관심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 양국 간에 어디 시급하거나 중대한 외교적 현안이 있겠습니까.
참모들이 꽤나 신경을 썼겠지만, 격조나 품격은 옷이나 치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삶의 자취와 견지해온 신념과 가치에서 우러나온다는 사실을 이번엔 꼭 새겨야 할 것입니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유럽연합의 새로운 지도자로 떠오르는 건 패션 때문이 아니라, 그 탁월한 포용력과 진정성 그리고 원칙과 신념 등 지도자로서 자질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리더십으로 메르켈은 세계적인, 특히 유럽의 경제위기 속에서도 독일 사회를 안정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애칭은 독일어로 ‘무티’라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엄마입니다. ‘엄마 리더십’으로 ‘가화만사성’을 이뤄, 위기 속에서 독일을 안정시킨 겁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착잡해집니다. 대통령이 영국 여왕과 나란히 마차를 타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국내 상황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니 말입니다. 집안이 사분오열의 위기인데 무슨 일인들 제대로 이루어지겠습니까. 게다가 갈등과 분열의 고리가 지난 대선 때 국가기관의 선거 부정인데도, 대통령은 한편으론 모른 척, 다른 한편으론 공작적 접근을 해왔습니다. 도저히 ‘수신’ ‘제가’는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훌륭한 패션으로 세인의 눈길을 끈다고 해도, 그것이 자부심으로 이어지는 건 불가능합니다. 일회성 이벤트로 타박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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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피가로 누리집 화면 캡처 |
실제 대통령이 이번 순방중 처음 인터뷰한 프랑스 정론지 <르 피가로>의 관심도 한-프 외교 현안이 아니라, 한국의 국내 정치와 남북관계에 집중됐습디다. 기자는 심지어 창조경제의 내용과 기초연금 위약 문제 그리고 경색된 남북관계 문제 등에 대해 아프게 물었습니다. 그것이 힐난처럼 들린 건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집안일이나 잘하실 일이지…’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답변은 더 어처구니없게 만들었습니다. “야당으로부터 권위주의 체제로 회귀하는 것은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계신데,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권위주의 회귀라니요? 그런 주장은 정치적 공세일 뿐입니다.” 국가기관의 선거 부정, 정보기관의 정치 공작 문제를 따지는 게 정치 공세인가요?
이에 대해선 이런 변명도 덧붙였더군요.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잘 활성화된 민주주의 국가 모델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야당이 주장하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권위주의 체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멀쩡한 교직원노조를 법의 보호 밖으로 밀어내고, 공무원의 단결권을 불법으로 몰아세우고, 정보기관의 불법 사찰이 버젓이 이뤄지고, 사찰을 통해 검찰총장과 특별수사팀장을 찍어내고…. 그런데도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있으니, 묻는 기자도 귀가 의심스러웠을 겁니다. 아마 그가 우리 사정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나치즘과 다를 바 없는 유신체제를 두고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분칠했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을 떠올렸을 겁니다.
기왕에 유럽을 순방하고 있으니, 그곳의 민주주의를 배워오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국민은 물론 영연방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엘리자베스 2세의 품격을 ‘벤치마킹’하기 바랍니다. 영국 왕실이 외국 정상을 초청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건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기여도라고 합니다. 물론 박 대통령은 이 덕목이 아니라, 동북아의 첫 여성 대통령 등의 까닭으로 초청받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여성 정상으로서 남다른 모습을 갖춰야 할 겁니다. 외국 순방중인 대통령이라고, 야당도 비난이나 공세를 자제하고 있는데, 대통령이 국내의 목표물을 향해, 정치 공세 운운하며 총을 쏴선 안 될 것입니다. 그 점에선 메르켈 총리의 덕목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독일에서는 좌우 대연정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집권 기독교민주당은 지난 9월 총선에서 41.5%의 득표로, 제1야당인 사회민주당(25.7%)을 압도했지만 10월부터 사민당과 연정 협상에 돌입했습니다. 큰 걸림돌도 없어 보입니다. 메르켈이 압도적 지지 속에서도 왜 담대한 통합의 정치를 추진하는지는 알고 있겠죠? 독일은 중대한 위기 국면 혹은 중요한 국가적 과제가 있을 때면 좌우 대연정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거나 국가적 과제를 성취하곤 했습니다. 그런 포용력과 정치력은커녕 갈등과 분열만 부추긴다면 아무리 멋진 패션인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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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 |
우리는 그야말로 ‘엄마 리더십’으로 무장한 메르켈 같은 지도자를 기대했습니다. 솔직히 이제 9개월밖에 안 됐는데 그 기대를 접고 있습니다. 부디 이번 순방이 민주주의의 기초를 체험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그런 나라엔 군, 정부기관, 행정부처가 선거에 동원되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결사권은 물론, 노조의 정치적 표현 및 선택의 자유를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르 피가로>는 “39년 만에 박근혜 공주 파리에 다시 오다”라고 했더군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겠죠? 착잡합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