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준 칼럼] 타이거의 현실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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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 우즈는 디 오픈에서 7오버파 143위로 컷탈락 한 후 “공은 잘 쳤는데 왜 그런지 바람을 이기지 못했다. 공의 스핀량에 대해서 체크해 보겠다”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미디어 센터의 기자들은 그 얘기를 듣고 우즈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며 뻔뻔스럽기까지 하다고 빈정거렸다.
물론 우즈는 공을 잘 치지 못했다. 연습장에서 잘 쳤는데 실제 대회에선 못 쳤다. 메이저대회의 중압감 속에서 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드라이버는 좋았다. 그러나 9번 아이언을 30야드나 짧게 치면서, 웨지샷을 축구장만한 그린에 올리지 못하면서 잘 쳤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메이저 첫 라운드 첫 홀 보기를 하는 악습도 이어졌다. 그는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우즈가 디 오픈에서 공을 그런대로 잘 칠 때가 있긴 했다. 그러나 점수를 잔뜩 줄여야 할 1라운드 전반 9홀에서 4타를 잃으면서 희망이 사라진 후다. 압박감이 사라진 후 잘 치는 건 야구에서 승부가 결정된 후 홈런을 치는 것만큼 의미가 없다.
경기 전부터 그는 허풍이 좀 셌다. 우즈는 “이번 대회에서 당연히 우승을 노린다. 거의 다 됐다. 예전보다 오히려 공을 잘 친다”고 했다. “메모리얼 토너먼트에서 85타를 친 내가 이렇게 얘기하면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 때는 중요한 변화를 하던 때였고, 코스가 매우 어려운데도 나는 변화를 시도했고, 성공했고, 그래서 이후 공을 매우 잘 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너무나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들을 때 우즈가 정말 디 오픈에서 우승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우즈의 “돌아왔다” 주장의 논거 중 하나는 “올해 마스터스에서 우승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기자의 기억과는 달라서 혹시 잘 못 들었나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스크립트를 보니 제대로 들었다. 예전에 토익 공부한 게 효과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는 마스터스에서 우승 기회를 가졌다고 얘기했다.
기록을 찾아봤다. 우즈는 마스터스에서 첫날 1오버파를 쳤다. 선두 조던 스피스와 9타 차가 났다. 최종 성적은 17위였다. 스피스와 13타 차 였다. 그 중간에 잠깐 반짝한 적은 있다. 3라운드를 마치고 공동 5위까지 올라갔다. 이전 대회에서 뒤땅을 치며 기권을 하기도 했던 우즈로서는 장족의 발전이었으나 말 그대로 잠깐 반짝이었고 그 때도 선두와 차이(10타)가 너무 컸다.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기적이 일어난다면 몰라도,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우승 기회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즈는 믿었다. 마스터스에서 우승할 기회가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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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가장 최근 나간) 그린브라이어 클래식에서 공을 매우 잘 쳤다. 그 때 퍼트를 엄청나게 못했는데도 선두와 4타 차에 불과했다”고 했다. 그렇게 잘 한 건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됐다. 선수들 말이 맞나 일일이 뒤질 필요는 없지만 이왕 사실 확인에 나선 김에 역시 찾아봤다.
우즈가 그 대회에서 요즘 보기 드물게 공을 잘 친 것은 맞다. 그러나 우승자와 4타 차가 아니고 6타 차였다. 우즈는 퍼트 몇 개만 더 들어갔다면 우승할 수 있었다고 믿는 듯했지만 실제는 그렇지는 않다. 그는 공동 32위였다. 그냥 컷 통과한 선수들 중 중간이었다.
3라운드가 끝난 상황에서 우즈는 공동 선두 박성준 등 4명과 7타 차이였다. 최종라운드 우승자 그룹과 간격을 한 칸 줄였지만 의미는 없었다. 중위권 선수가 최종라운드 아무런 부담이 없는 상황에서 성적을 올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골프계에서는 판단한다. 그렇게 해서 톱 10에 들어가는 경우를 ‘뒷문으로 슬그머니 들어간다’고 표현한다. 우즈는 뒷문 쪽으로 갔지만 들어가지도 못했다. 톱 10이 아니라 공동 32위라는 성적표를 받은 게 전부다. 또 정상급 선수들이 거의 출전하지 않은 대회였다.
퍼트가 좀 나았어도 상황이 바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즈는 굳게 믿고 있었다. 공을 가장 잘 쳤는데 퍼트가 안 들어가 아쉽게 우승을 놓친 대회로.
우즈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사실을 몰랐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보고 때로는 원하는 것을 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왜곡할 수도 있다.
스포츠 스타들은 상대를 속여야 한다. 페널티킥을 차는 선수는 골키퍼를 속여야 하고 야구 투수는 타자를 속여야 한다. 그러다 보면 때로는 자신까지도 속인다. 스포츠의 슈퍼스타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다. 확신을 가진다. 그래야 이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긴다. 비루한 현실을 인정한다면 그는 슈퍼스타가 아니다.
우즈가 디 오픈 1라운드 티샷하기 직전까지 우즈가 일을 낼지도 모른다는 전망들이 조심스럽게 나왔다. 우즈의 확신에 찬 큰 소리 때문이기도 했고 조건이 우즈에게 완벽했기 때문이다.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코스는 우즈의 놀이터였다. 우즈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코스라고 누누이 밝힌 곳이다. 그는 이 곳에서 열린 디 오픈에 3번 나와서 2번 우승했다. 우즈는 경기 전 연습장에서 공을 잘 쳤다.
1라운드 우즈가 경기한 오전엔 약간의 미풍만 불고 전날 내린 비로 그린은 매우 부드러웠다. 마크 오메라 같은 노장들도 선전했고 1라운드 오전 경기한 선수들은 누구나 다 언더파를 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쉬웠는데 우즈는 4오버파를 쳤다. 만 65세의 톰 왓슨과 성적이 같았다.
우즈는 1라운드가 끝난 후 “다른 선수들과 타수 차이가 나지만 내일 날씨가 나빠진다면 (다른 선수들이 도망갈 수 없기 때문에) 따라갈 수도 있다”고 했다. 날씨가 나빠지면 우즈가 더 힘들어 질 것으로 보였는데 우즈는 거꾸로 봤다. 메이저대회에서 첫날 우승자가 결정되지는 않지만 안 될 사람은 첫날 충분히 결정된다. 우즈가 그랬다. 140등이라면 끝이다. 그런데 우즈는 인정하지 않았다.
우즈의 말 꼬리를 잡아서 그를 인민재판에 넘기려는 건 아니다. 학자나 기자는 사실을 틀리면 안 되지만 선수는 그래도 된다. 세계랭킹이 241위 선수라도 1등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우승 기회를 잡지 못했는데 아쉽게 우승을 놓쳤다고 생각해도 된다. 뒤땅을 치면서도 내가 제일 잘 친다고 생각해도 된다. 허리가 아픈데 아프지 않다고 생각해도 된다.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그는 확신범이다. 누군가 망상이라고 할지 몰라도 우즈는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종교 지도자처럼 굳게 믿는다. 어떤 기자가 의심을 했다. “혹시 은퇴할 생각은 없느냐.” 우즈는 웃으면서 “당신들 중 일부가 나를 (땅에) 묻어서 보내려 하지만 나는 바로 여기 당신들 앞에 있다”고 했다. 땅에 묻어도 살아나는 그는 십자가에 매달렸다가 부활한 예수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를 의심하던 기자는 가롯 유다였고 나는 예수를 새벽닭이 울기 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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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의 시대는 아주 길었다. 왕정 속에 살던 사람이 혁명으로 공화제가 되면 정신적인 혼란이 일어난다. 기자도 그렇다. 그가 첫 홀 웨지샷을 스윌컨 개울에 빠뜨리며 아쉬워하는 모습은 차마 보기 어려웠다. 오랫동안 타이거 우즈라는 황제의 위용 속에 산 사람으로서 그가 꼴찌를 하는 것은 너무나 어색하다. 불편하다. 그가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면 내가 고개를 숙이는 것 같다.
그래서 우즈가 큰 소리를 치는 것이 오히려 보기 좋다. 그 거만함이 무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굳게 믿으면 이뤄지기도 한다. 나폴레옹이 헬레나 섬에 유배를 가서도 기가 꺾이지 않았고 잠시나마 다시 정권을 잡았던 것처럼 우즈도 마지막 불꽃을 피울 시기가 올수도 있겠다. 그가 계속 믿는다면 가능하다고 본다.
US오픈과 디 오픈에서 참패한 그가 현실을 직시하고 의욕을 잃어 의기소침해지지 않을까. 당분간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우즈는 1라운드 후에 고개를 꼿꼿이 들고 “의욕은 한 번도 나에게 문제가 된 적은 없다”고 했다. 컷 탈락한 후에는 “다음 대회에서 우승하고 싶다”고 했다. 2021년 150주년 디 오픈이 열리는 2021년 세인트 앤드루스에 다시 올 것이냐는 질문에는 “머리숱이 줄어들 것 같지만 그 땐 더 잘 하고 싶다”고 했다.
적어도 그의 가슴 속에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그 불꽃의 연료가 사실이든, 희망이든, 망상이든 상관없다.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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