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복의 인물탐구/ 더민주 추미애 대표, 180도 변신과 돌출에 숨겨진 ‘원칙’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당대표 후보가 8·27 전당대회를 앞둔 18일 국회의원회관 집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당대표 후보가 8·27 전당대회를 앞둔 18일 국회의원회관 집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장면 1 1996년 7월 31일 김대중(DJ) 국민회의 총재는 영남 표심을 얻기 위해 전력을 쏟았다. DJ는 합천 해인사를 찾아 방장스님의 설법을 듣고, 동서 화합의 상징인 경남 하동 화개장터에서 대규모 지역화합 행사를 열었다. DJ는 섬진강 은어회를 먹고, 해인사 아래 조그만 숙소에서 쉬었다. 찌는 듯한 복 날씨에 빡빡하게 이어진 행사로 심신이 지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이 따라간 젊은 기자들은 힘이 넘쳤다. 기자들은 합천 읍내의 허름한 술집(노래방 비슷했다)으로 국회의원들을 불러냈다. 단연 기자들에게 인기를 끈 이는 추미애 의원이었다. 쉬고 있던 추 의원은 당 지도부의 ‘권유’ 아닌 ‘지시’로 늦은 시간이었지만 술집에 나타났다. 정계 입문 1년, 금배지를 단 지 3개월밖에 안 된 추 의원은 노래를 ‘기막히게’ 잘 불렀다.(그가 부른 노래는 노사연의 ‘만남’이었던 것 같다) 추 의원은 수줍은 표정으로 기자들의 앙코르 요청에 응했다.

#장면 2 2001년 7월 5일 밤 서울 광화문 인근에 있는 한 한정식집.(이 현장에 기자는 있지 않아 보도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당 모임을 마치고 추 의원을 비롯해 몇몇 의원이 남아 기자들과 술을 마셨다. 지역구 재선에 성공하고, 여당까지 된 추 의원은 ‘실세’였다. 마침 소설가 이문열씨가 한 보수신문에 DJ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술에 취한 추 의원은 손으로 탁자를 내려치며 “이문열같이 가당치 않은 놈이… ×같은 <○○일보>에 글을 써서…”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추 의원은 또 다른 보수신문 기자를 향해 “네가 정의감이 있느냐, 비겁한 놈. 사주의 지시로 글을 썼느냐, 이 새끼야”라고 막말을 했다. 물론 기자도 술잔을 집어던지는 등 추 의원과 맞섰다.

장면1과 장면2는 기자가 정치인 추미애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다. 그가 처음 정계에 입문했을 때에는 장면1처럼 ‘한국적 미인’의 수줍은 이미지를 줬다. 하지만 재선에 성공한 그는 장면2처럼 180도 달라져 있었다. 달라진다는 것은 정치인에게 좋지 않다. 정치인들이 매번 ‘초심을 유지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추미애라는 인물을 겪어보면 추미애는 ‘달라지지 않았다’이다. 장면1에서 받은 기자의 느낌은 추미애라는 인물의 내면을 잘 몰랐던 것이다. 추미애는 원래 그렇게 당돌하고 대찬 인물이었다. 그는 모범생이던 여고시절에도 ‘돈을 밝히는 선생’을 보고 교실문을 박차고 나올 정도로 불의에 분노하고 저항을 표시했다. 그는 판사 시절에도 역시 법조비리에 얽혀 있던 법원 공무원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에서 공무원 개혁을 책임질 행정자치부 장관 물망에 유력하게 올랐다. 본인도 “내가 (장관으로) 가서 싹 혁파해 버리겠다”고 말하곤 했다. 이 소문에 지레 ‘겁’을 먹은 행자부 간부들이 그에게 줄을 대기 위해 뛴다는 소문이 관가에 파다했다. 그는 아버지뻘 되는 의원에게 “담배냄새 싫으니 저쪽 가서 피우라”고 면전에서 할 말을 했다. 그는 의원총회에서도 단골 강성 발언자여서 남자 의원들은 “추미애가 무서워”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 ‘추다르크’라는 그의 별명은 그래서 적절하다.

그가 8월 27일 제1야당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당히 당대표에 선출됐다. 3파전에서 과반이 넘는 54.03%의 득표율을 얻는 압승이었다. 일부 언론에서 그를 민주당계 정당 역사상 최초의 TK 출신 당대표라고 했지만 사실은 다르다. 2000년 DJ가 만든 새천년민주당에 경북 출신 김중권 대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그는 여소야대 지형의 제1야당 대표라는 막강한 힘을 가졌다. 그의 정치적 가치가 최고조에 이른 것이다.

고교시절부터 당돌하고 대찬 성격

추 대표는 1958년 대구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부모의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세탁소에 도둑이 들어 옷값을 변상하느라 집안이 어려워진 데다 막내까지 태어나자 부모님은 세살밖에 안 된 그를 외갓집에 보냈다.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외갓집에서 자란 그는 강한 ‘독립심’을 키웠다. 그에게 자주 나타나는 ‘반항적 기질’과 ‘기득권에 대한 분노’는 이때 형성된 결핍심리일 수도 있다. 그가 부모의 반대에도 호남 출신에 다리 장애까지 있는 대학(한양대) 동기동창(서성환)과 결혼한 것도 이런 연장선일 것이다.

그는 1982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춘천·인천지방법원, 광주고등법원 등에서 판사를 했다. 법조계에서는 영호남을 넘어선 캠퍼스 커플 판사로 통했다. 하지만 판사 생활 10년 만인 1995년 DJ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다. 대구 출신이 친구들과 달리 호남 출신 DJ가 만든 당에 가는 것은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는 초선 의원 시절 전관예우와 법조 브로커가 얽힌 사법부 부패의 실상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그는 사법적 정의에 실망해 정치적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정치에 뛰어든 것이다. 그가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택한 ‘세탁소집 둘째 딸이 부정부패한 정치판을 세탁하러 왔다’는 슬로건도 그의 진심이었다.

그의 진가는 이어진 1997년 대선에서 빛이 났다. 그는 DJ 특보, 유세단장으로 지역감정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때 얻은 별명이 바로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잔다르크에서 따온 ‘추다르크’다.

1997년 DJ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의 정치적 주가는 더욱 뛰었다. 2000년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이 선정한 ‘20세기를 빛낸 여성, 21세기를 빛낼 여성’에, 2003년 <시사저널>이 시민단체 활동가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차세대 지도자감 1위’로 뽑혔다. 2004년에는 ‘국민이 뽑은 정당의 최고 정치지도자 1위’(<월간중앙>-ANR 공동 여론조사)에 선정되기도 했다.

#장면 3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추미애 의원은 ‘무명’의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다. 그는 노무현 후보 측 ‘국민참여운동본부 공동본부장’을 맡아, 돼지저금통 선거자금 모으기 운동에 나서 ‘돼지엄마’라는 별명도 얻었다. 노 후보도 유세를 하면서 그를 ‘차세대 지도자’로 공인했다. 그러나 그는 2004년 노무현 탄핵에 가담했다. 자신이 만든 대통령을 스스로 탄핵하겠다는 180도 다른 정치적 선택을 한 것이다. 그는 광주 전남도청에서 망월동까지 3일간 삼보일배를 했지만 탄핵역풍을 맞고 17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첫 시련으로 기록된다.

#장면 4 낙선의 회한을 달래던 추 의원은 2008년 18대 총선에서 재기에 성공했다. 지역구 3선인 그는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을 맡았다. 그런데 전혀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2009년 12월 30일 추 위원장은 정부·여당이 합의한 노동관계법을 야당 의원의 참여를 막고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본회의에서 날치기로 통과됐다. 야당의 당론도 물론 반대였고, 그때까지 추 위원장의 ‘노동관’에 비추어 180도 다른,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때 통합진보당 이정희 의원은 추 위원장을 향해 “위선자,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이은 두 번째 배신”이라고 소리쳤다. 당론을 어기고 여당의 ‘날치기’에 동조한 추 위원장은 자격정지 2개월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추 의원은 이 사건으로 당내에서 ‘왕따’당하고 이후 서울시장 출마계획 등에 차질을 빚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8월 31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며 너럭바위를 손으로 만지고 있다. /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8월 31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며 너럭바위를 손으로 만지고 있다. / 연합뉴스

장면3과 장면4도 장면1과 장면2처럼 180도 변신이다. 왜 그는 자신이 만든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하려 했을까. 물론 그는 자신이 주도하지 않고 ‘따라갔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가 왜 탄핵에 동조했는지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다. 그 중에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 ‘강금실 법무장관’에 비해 덜 대접받은 섭섭함도 포함된다. 그는 장관 물망에 여러 번 올랐지만 기용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강 장관과 비교될 때 ‘질투’를 나타내기도 했다.

이런 섭섭함도 작용했겠지만 기자는 보다 깊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추 대표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DJ에 대한 거의 맹목적 추종이 발견된다. 장면2에서 언론사 세무조사를 비난한 소설가와 기자에게 욕을 한 심리적 배경에는 ‘DJ에 대한 비난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굳건한 소신이 자리한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으로 DJ를 겨냥하자 노 대통령과 갈라선 것이다. 즉 장면2와 장면3은 같은 바탕을 깔고 있는 것이다.

봉하마을 찾아 눈물의 참회

어찌 됐든 그는 이 선택이 잘못임을 인정했다. 그는 “대선운동을 해냈고 같이 부둥켜안고 승리를 기뻐했던 대통령과 인간적인 해후를 하지 못한 채 영영 작별했다”면서 “사과의 타이밍을 놓친 것을 무척 후회했다”고 고백했다.(자신의 저서 <물러서지 않는 진심>(2013년) 그는 이번 전당대회 전·후 봉하마을을 찾아 눈물로 참회했다.

장면4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있는 대목이다. 복수노조를 허용하는 현재 이 노동조합법에 대해 그는 “노조도 독점시대에서 경쟁시대로 넘어갔다”면서 “13년간 누구도 손대지 못하고 미룬 법이 이제 빛을 보게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금도 이 선택이 옳았다고 믿고 있다. 그가 확신을 갖는 이유는 2인 이상이면 누구나 단결권을 가진다는 헌법의 원칙과 그는 (일부) 귀족노조를 기득권 세력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앞서 보였던 원칙과 ‘기득권에 대한 분노’라는 그의 스타일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추미애 대표에 대한 비판은 ‘일관성이 없다’, ‘의외로 튄다’는 것이다. 즉 장면1, 장면2, 장면3, 장면4는 전부 180도 변신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면마다 일관되게 흐르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정의를 지키려는 원칙과 소신, 특히 기득권에 대한 분노다. 사실 이는 야당의 덕목으로, 천상 그는 ‘야당체질’이다. 이는 야당인지 여당인지 모를 모호한 행보를 걷던 김종인 체제에 대한 반성으로 딱 적임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도 문제는 있다. 그가 개인적 원칙과 소신으로 기득권에 저항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노동법 통과와 같은 경우는 이로 인해 민주노총 등 전통적 지지세력을 잃었고, 4대강사업 비판을 무기로 이명박 정부와 싸우는 전선이 흐트러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결국 그의 종합적 정치 판단은 미숙했던 것이다. 큰판을 보는 시야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그래서 나온다.

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면서 반성과 참회도 많이 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어선 안 된다. 그는 현재 지역구 5선에 막강한 여소야대의 제1야당 대표다. 무엇보다 내년 대통령선거 경선 관리자로, 정권교체 적임자를 뽑아 승리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소임을 안고 있다. 그의 별명 ‘추다르크’의 원조 잔다르크가 했던 진짜 임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9101052001&code=910100#csidx492f17cc698b893b9c800af0f30987c

Posted by 어니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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