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저는 술집 여성입니다" 그 고백이 황금동 여성들에게 준 위로
[박정훈이 박정훈에게] 광장에서 연대한 소수자·약자들...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라
24.12.19 06:59ㅣ최종 업데이트 24.12.19 06:59
흔한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 '오마이뉴스 기자 박정훈'과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 박정훈',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연대를 모색해 나갑니다.[편집자말] |
▲지난 11일 부산 서면 탄핵 집회에서 발언한 여성 시민 A씨의 모습X 캡처
비상계엄부터 탄핵소추안 가결까지, 11일간 매일 전국 곳곳에서 윤석열의 탄핵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습니다. 동시에 많은 시민들이 연단 위에 올라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고요. 특히 지난 11일 부산 서면 시위에 등장한 한 여성 시민 A씨의 발언은 온라인상에 퍼지면서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저기 온천장에서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는, 소위 말하는 술집 여자입니다. '너같이 무식한 게 나대서 뭐 하냐', '사람들이 너 같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줄 것 같으냐' 같은 말에 반박하고 싶어서, 또 많은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고 저를 경멸하거나 손가락질하실 것을 알고 있지만, 오늘 저는 민주 사회의 시민으로서 그 권리와 의무를 다하고자 이 자리에 용기내어 올라왔습니다."
탄핵 정국이 끝난 뒤에도 우리 주변의 소외된 시민들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우경화의 흐름을 경계하고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울림이 컸습니다. X에 올라온 발언 영상은 조회수가 520만이 넘었고, 언론 보도 등을 통해서도 그 내용이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A씨는 <한겨레> 인터뷰에서 직업을 밝힌 이유에 대해 "나도 시민이고 여러분 근처에 있고, (여러분과) 별반 다름없는 사람이라는 걸 전하고 싶었다"라며 "(다른 시민과) 거리감을 좁혀서 저도 이번 사태에 분노하고 민주사회의 똑같은 시민으로서 발언할 수 있다는 걸 알려드리려고 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정훈님, 저는 그의 말을 듣고 44년 전 '황금동 여성들'이 떠올랐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과 맞서고 시민들을 도운 '황금동 콜박스' 거리 유흥업소에서 일하던 여성들은, 자신들도 헌혈할 수 있게 해달라며 '내 몸은 더럽지만 내 피는 깨끗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황금동 여성들의 마음도 A씨의 마음과 비슷했을 겁니다. 그저 민주사회의 똑같은 시민이니까 함께 싸우고자 했던 것이겠죠. (관련 기사: 인자, 진, 아방궁... 5.18 숨은 주역 '황금동 여성들'을 찾습니다 https://omn.kr/1nlxg)
▲518 당시 광주 한 병원의 모습. 사진은 '황금동 여성들'의 이야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5.18기념재단 영상캡처
황금동 여성들은 계엄군에게 짱돌을 던지고, 시민군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금남로에 주먹밥 등 생필품을 보급하고, 시신들을 수습해서 염을 하는 등 조직적으로 항쟁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의 활약상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5.18과 관련된 황금동 여성들의 직접 증언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흥업소에 일했다는 이유로 편견을 갖고 바라보는 사회의 분위기가, 황금동 여성들이 공개적인 증언에 나서길 어렵게 만드는 배경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 부산 서면 집회 무대에 선 여성 시민의 발언이 황금동 여성들에 대한 위로처럼 느껴졌습니다. 차별받고 천대받아 왔던 소수자·약자들도 불의에 맞서 함께 싸워온 역사가 있었노라고, '우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존재 하나하나가 결코 지워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러준 것이니까요. 그렇게 1980년 황금동 여성들의 용기가 2024년 광장에서도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동자동 주민들이 나눠준 떡, 이것이 '연대'다
실제 이번 탄핵 집회에 모인 얼굴들은 다양했습니다. 사회 안전망을 보장받지 못한 빈민,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하다가 지하철에서 끌려 나갔던 장애인, 여전히 극심한 차별을 경험하는 성소수자, 부당하게 해고당한 비정규직 노동자, 쌀값 폭락에 절망한 농민, '페미니스트'라고 손가락질당하는 여성 등 소외당하고 억압받던 존재들이 광장에서 깃발이나 피켓 등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윤석열 정권이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배제했던 존재들이기도 합니다. '부자 감세'를 하면서 서민 예산을 대폭 삭감했고, '건설노조 때리기'를 비롯한 노동 탄압은 또 얼마나 극심했습니까. 극우 인사를 국가기관 곳곳에 포진시키고 인권 정책을 후퇴시키면서, 소수자에 대한 교묘한 '입틀막'이 정권 내내 이어졌습니다. 그러니 이들이야말로 '윤석열 탄핵'을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지난번에 정훈님이 "노동탄압이 과거에는 지지율을 올리는 지렛대가 되었지만, 지금은 윤석열 정부가 넘어가는 지렛대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말이 예언처럼 맞아 떨어진 듯합니다. 윤석열 정권의 탄압에 고통받던 이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광장에 나와 응원봉과 촛불을 들었으니까 말입니다.
열악한 주거 환경인 '쪽방'에서 살아가는 동자동 주민들도 14일 여의도 탄핵 집회에 나섰습니다. 심지어 시민들에게 나눠줄 하얀 절편 40kg(300개)을 들고서요. 그들이 떡과 함께 나눠준 노란 종이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소위 쪽방촌이라고 불리는 가난한 동자동에서 왔습니다. 십시일반 돈을 모아 떡을 조금 준비해 왔습니다. 드시고 함께 힘을 내면 좋겠습니다."
국회의사당 4·5번 출구 사이에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농성장 앞에서 시민들에게 절편을 나눠주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연대'가 무엇인지 실감합니다.
집회 현장에서 음식을 나눠 먹는 일은 배고픈 속만 든든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든든하게 만듭니다. 더불어 서로가 이어져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구호를 외치는 사람을 그저 '남'으로 생각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렇듯 있는 사람이 선심을 베푸는 게 아니라, 없는 사람이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어주며 마음을 나누는 일이 탄핵 집회 내내 이어졌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힘이 되어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불의한 권력자는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내란 수호' 국민의힘 균열 낸 것은 광장에 모인 시민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처리 하루 전인 지난 13일 오후 여의도 국민의힘앞에서 ‘내란수괴 윤석열 즉각 탄핵 시민촛불’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여사와 검사를 태운 윤석열차’와 ‘내란의힘’을 적은 대형현수막을 찢고 있다.권우성
비상계엄과 탄핵 국면에서 마음을 졸였던 장면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비상계엄 당일 국회로 들어오는 계엄군의 모습이었습니다. 국회 안팎에서 시민들과 국회 보좌진들이 격렬하게 저항하지 않았다면 아마 계엄군은 '해도 되는 일이구나' 싶어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국회를 점령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하나는 14일 탄핵소추안 재표결이었습니다. 사실 결과를 낙관하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하지만 받아 든 결과는 '찬성 204표'. 기뻤지만 동시에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국민의힘에서 무려 96명의 의원들이 반대·기권·무효를 통해서 탄핵을 저지하고자 한 것이 기가 막혔습니다.
14일 탄핵안 가결이 없었다면 과연 앞으로의 정국이 어떻게 되었을지 아찔합니다. 국민의힘은 재표결 전까지 '탄핵 반대'라는 당론을 유지했고, 오락가락하긴 했지만 결국에 탄핵에 찬성한다는 '상식적인' 입장을 표명한 한동훈 전 대표를 쫓아냈습니다. 그 이후 '내란' 혐의를 받고 있는 대통령의 책임을 묻기는커녕, '배신자 색출' 운운하는 목소리만 나옵니다. 어느새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내란까지 두둔할 수 있는 '반헌법적 집단'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국민의힘은 윤상현 의원의 "1년 후에 국민은 또 달라진다"라는 말을 굳게 믿고 있는 듯합니다. 지역구 의원 65%(90석 중 59석) 가량이 영남권 의원이라는 점도 '버티면 또 뽑아줄 거다'라는 잘못된 믿음을 유지시키는 기반일 겁니다. 어느새 그들은 국민들의 분노보다는 당이나 우파세력으로부터 '배신자'로 낙인 찍히는 걸 더 무서워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나마 시민들이 있었기에 12명의 이탈 표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팟캐스트 방송 '매불쇼'에 출연해서 "비상계엄 있었을 때 헬기 소리를 본회의장에서 못 들었다. 그런데 저 소리(탄핵안 가결에 환호하는 소리)는 들렸다. 헬기 소리보다 몇 배 컸던 거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역으로 여의도에 모인 수많은 시민들의 분노 섞인 구호가, 국민의힘 위원들에겐 '큰일 나겠다'는 위기감이 들게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부 의원들이 헌법과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는 명분이자 계기가 됐을 것이고요. 비상계엄 이후 11일만에 이뤄진 탄핵안 가결은 광장에 시민들이 그처럼 많이 모이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던 겁니다.
광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처리를 앞둔 지난 1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앞, 여의도공원, 여의대로, 여의도역까지 탄핵안 가결을 촉구하는 시민들로 가득하다.연합뉴스
시민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화국을 지키는 동시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을 품고 광장에 서 있었습니다. 윤석열이 탄핵당하고 죗값을 치르는 것은 물론 윤석열이 상징하는 모든 퇴행과 혐오와 작별한 세상, 나아가 탄핵 집회에 나온 시민들의 다양한 열망이 묻히거나 잊히지 않고 사회 시스템과 정책에 반영되는 그런 세상 말입니다.
이번 탄핵 집회에서는 소수자·약자들의 존재감이 컸고, 이는 주최 측의 집회 진행에도 반영이 됐습니다. 몇몇 지역의 탄핵 집회는 '평등 집회'를 표방했고, 14일 여의도 집회에서도 시작 전 "민주주의는 성별, 성적지향, 장애, 연령, 국적 등 서로 다른 사람이 배제되지 않고 안전하고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곳에서 가능하다"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거나 배제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평등하고 민주적인 집회를 위한 모두의 약속')는 내용의 약속문을 함께 읽었습니다. 전장연이 진행하는 '장애인 시민권열차 탑승 지지 백만시민 서명운동' 참가자가 지난 3일 이후 급격히 늘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립니다. 시민들은 이미 '윤석열 탄핵, 그 너머'를 보고 있습니다.
"저기 쿠팡에서는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파주 용주골에선 재개발의 명목으로 창녀들의 삶의 터전이 파괴당하고 있습니다. 동덕여대에서는 대학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고 있고, 서울 지하철에는 여전히 장애인의 이동할 권리가 보장되고 있지 않으며, 여성들을 향한 데이트 폭력이, 성소수자들을 위한 차별금지법이, 이주 노동자의 아이들이 받는 차별이, 그리고 전라도를 향한 지역혐오가, 이 모든 것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완벽하지 못한 것입니다." - 11일 부산 서면 집회 A씨의 발언 중.
A씨의 발언은 탄핵 집회의 결과가 단순히 '정권교체'로 수렴될 순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민들이 야당 또는 야당 지도자만을 위해 계엄군과 싸우고, 추운 날 광장에서 목소리가 쉴 정도로 '윤석열 탄핵'을 외친 게 아닐 테니까요. 윤석열을 몰아내는 것 이상의 근본적인 사회 변화가 필요하다고, 특히 윤석열 정권이 탄압했던 이들에 대한 회복과 안전망 설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정훈님, 아직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인용이 안 됐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누군가는 섣부르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시민들은 그전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윤석열 정부가 탄생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2016년 촛불집회에서 표출된 시민들의 목소리를 문재인 정부가 충분히 성찰하고 수용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민들의 의구심도 큽니다. 국민의힘이 괜히 적극적으로 '탄핵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 좋은 일만 시키는 것'이라는 레토릭을 구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거나, 이것부터 하고 저것은 '나중에' 하자는 그런 말은 더 이상 시민들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민주 정부'에서도 그렇게 누군가의 삶이, 인권이 뒷전이 된 케이스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봐왔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를 지킨 시민들의 존재를 하나하나 기억하고, 그들의 뜻을 한국 사회에 반영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는 이전부터 소수자·약자들이 외쳤던 구호에 정답이 있습니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정치적인 계산에 따라 미뤄왔던 일들을 이제는 정치권이 외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