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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고승덕의 진실, 서울시민 위해 알려야 했다"
[인터뷰] 고승덕 딸 아닌 세월호 활동가 '캔디 고'를 만나다
▲ 세월호 활동가로 살아가는 캔디 고 씨를 뉴욕 맨해튼에 있는 'Space Gabi'에서 만났다. | |
ⓒ <뉴스 M> 유영 |
지난 4월 뉴욕에서 세월호 2주기 추모 행사가 열렸다. 그곳에서 한 여성을 보았다.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뒷자리에 앉은 그는 앳된 얼굴이었지만 학생 같지는 않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 같아 한참 멀리서 지켜보았다.
행사가 시작되고 얼마 후 카메라에 아까 본 낯익은 얼굴이 잡혔다. 그가 뚜벅뚜벅 단상에 올랐다. 그림을 통해 세월호를 기억하고 알리는 작업을 진행한 예술 집단 '크리에이트(K/REATE)'를 소개했다. 그의 이름은 '캔디 고', 이름을 듣는 순간 '아하! 그때 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흥분했다.
2년 전, 서울시 교육감 선거 후보였던 고승덕의 딸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 하나로 대한민국이 들썩였다. 뉴스에서 보았던 얼굴이 떠올랐다. 단상에 오른 그와 방금 떠오른 사진 속 얼굴은 분위기가 비슷했다. 그는 예술을 통해 세월호 사건을 알리고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의구심이 들었다. 그 '캔디 고'와 동일 인물일까?
연예인을 만난 느낌이었다. 호들갑을 떨면서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그러나 혹시 실례가 될까, 함께 사진도 찍지 못하고 헤어졌다. 아쉬운 마음에 그 날 밤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어 정중하게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했다. 물론 바로 수락을 해주었다.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고 한 달 후 인터뷰로 다시 마주하게 됐다.
편견 앞에 서다
그의 프로필은 화려하다.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외손녀이자 전 서울시 교육감 후보 고승덕 변호사의 딸, 고 전 후보의 낙선에 큰 영향을 미친 글을 썼다. 그 일로 매우 유명해졌다. 그때 그 사건은 지금도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악의적인 댓글도 수없이 많다. 캔디 고 씨에 대한 소문과 편견은 지금까지 난무한다. 기자는 세월호 추모 행사에서 '캔디 고'라는 흔하지 않은 이름을 듣고도 직접 물어보기 전까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 또한 언론에서 캔디 고 씨를 규정한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 생긴 의심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궁금했다. 그의 행보가 특별해 보였다. 캔디 고 씨는 '활동가'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세월호를 미국 사회에 알리고자 노력하는 '활동가' 말이다. 더구나 그 활동은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기자가 상상했던 '캔디 고'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부유한 유명인의 2세는 기부할 수 있을진 몰라도 실제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진 '활동가'로 살아가기는 어려울 터이다.
편견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단호한 냉소가 내재해 있던 것은 비단 기자 개인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도 다 그럴 것이라는 말로 생각을 감싼 채 비겁하지만 잠시 대중에게 숨은 채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습과 좀 다른 것 같은데 어찌 된 일이냐고 말이다.
"사람들은 내가 굉장히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생각한다. 그건 오해다. 할아버지가 몸담았던 기업은 삼성 같은 글로벌 대기업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군인 출신이었고, 정부를 위해 일했다. 게다가 할아버지의 돈이 엄마의 돈이 아니듯, 내 돈도 아니다. 미국에 왔을 때 엄마는 싱글맘이었고, 힘들게 우리 남매를 키웠다. 난 과외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내가 부유하게 자랐을 것이라는 추측은 사람들이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오해이다."
(관련 내용은 다음 인터뷰 기사에서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캔디 씨 자신은 비록 부유하게 자라지 않았지만 부유하게 자란 사람이라도 사회 참여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회 문제는 공감하는 일이며 결국 내 가족, 내 이웃의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부유하거나 부유하게 자란 사람은 왜 사회적인 이슈에 관심을 두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 그건 합리적인 생각이 아니다. 그저 한 인간으로서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심을 두고 공감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피해자가 내 이웃일 수도 있고 내 사촌일 수도 있지 않나. 나와 관련이 없다고 해서 사회적인 이슈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위치에 있든, 나의 배경이 어떻든지 간에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캔디 씨는 지극히 상식적인 자기 생각을 명확하게 말했다. 그런 답변이 기자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동안 언론에 비친 그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던 탓인지 모르겠다.
캔디와 아버지
▲ "부유하거나 부유하게 자란 사람은 왜 사회적인 이슈에 관심을 두면 안 되는 지 모르겠다. 한 인간으로서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심을 두고 공감하는 것은 당연하다." | |
ⓒ <뉴스 M> 유영 |
캔디 씨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건 2년 전, 서울시 교육감 선거를 앞두고 쓴 고승덕 전 후보에 대한 페이스북 글 때문이었다. 고 전 후보에게 그동안 연을 끊고 살아온 두 자녀가 있었다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진 것이다. 캔디 씨는 부모의 이혼 후 어머니를 따라 미국에 왔다. 그 후 아버지는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자신의 자녀에게 연락하지 않아도 괜찮다. 무척 상처받는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하지만 나는 부녀 관계를 계속 이어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연락을 거부했다."
캔디 씨는 그때의 상황과 감정에 대해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자녀를 돌보지 않았던 고 전 후보의 행적은 세상 사람들에게 공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선거 결과가 그것을 말해주었다. 대중에게는 과거 교육감 선거에서 낙선한 한 정치인으로 기억되겠지만, 여전히 캔디 씨에게는 20년여 간 꾸준히 자신을 외면하고 살아 온 아버지일 뿐이다. 인터뷰 중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캔디 씨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고 전 후보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겠다고 했다.
"어릴 적 아버지와 둘이 길을 걷다가 어떤 사람이 쓰레기를 줍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 '저런 일 하고 싶지 않으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저런 불쌍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으면' 이라고 말했다. 늘 남을 자신보다 낮게 보고 그런 말들을 자주했다. 그 사람에겐 그 일이 중요한 일일 수 있다. 우리 각자 모두가 사회에 주어진 중요한 일이 있지 않나. 그 사람은 내가 위에 있으니 내 밑에 나보다 못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굉장히 견디기 힘들었다.
당시 그가 출마한 공직이 교육감이 아니었다면 그러한 글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아버지는 교육감 선거 이전에도 공직 생활을 했다. 하지만 교육과 관련한 자리에 좋은 교육을 제공할 수 없는 사람이 선출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녀 교육도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것을 떠나 사람과 교육을 생각하는 관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를 위해서도 서울 시민을 위해서도 진실을 알려야 했다."
2년 전 그가 쓴 페이스북 글이, 단순히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향한 개인적인 마음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어릴 적부터 어른들의 말을 무조건 수용하지 않고 고민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아버지의 유전을 받아 굉장히 고집이 센 사람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독립적이다. 엄마도 나에게 어떠한 공부나 과외도 강요하지 않았다. 주입식 교육보다는 자유롭게 교육받길 원했다."
조금 의외였다. 본인의 성격 형성에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의 영향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페이스북에 썼던 글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내용이 아니었다. 30년간 살아오며 형성된 다부지고 똑 부러진 성향, 그리고 세월의 풍파 속에서 자신을 오롯이 지켜낸 캔디 씨 그 자체였다.
그런 그에게 어리석게 느껴져도 어쩔 수 없는 질문을 이어갔다. 사실 2년 전 그가 쓴 글에 대해 당시 말들이 많았는데 가족의 어떤 압력이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물어야 했다.
"온전히 내 생각과 결정으로 쓴 글이다. 나는 어른이고 나 혼자 충분히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도 나에게 쓰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을 묵인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국민은 투표해야 하니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
고향의 봄과 가을이 그립다
이미 2년 전 언론을 통해 알려진 캔디 씨의 진심 어린 목소리다. 그러나 당시 많은 언론에서는 그 글을 정치적 공방으로 몰아갔다. 악플도 적지 않았다. 악플 따윈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았던 당당한 캔디 씨였지만, 당시를 떠올리며 표정이 굳어졌다. 정적이 흘렀다. 무언가 안 좋은 기억이 났는지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2년 전에 내가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고 나서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가 '한국에 사는 사람도 아니면서 왜 나서냐'는 말이었다. 정확한 지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미국에 원해서 오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의 손에 이끌려 오게 됐다. 어린아이에게 선택이나 결정권이 있을 리 없었다.
1998년 이후로 한국에 가을이나 봄에 가지 못했다. 한국의 사계절은 매우 아름답지 않나. 한국의 봄과 가을이 정말 그리웠다. 봄과 가을의 계절을 나는 잊지 못한다. 가을의 낙엽과 봄의 꽃내음도 생각난다. 미국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나는 누군가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헤어졌다고 말하고 싶다.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에 와서도 계속 한국 뉴스를 찾아보았다. 우리말이 서툴러서 한국 뉴스를 보고 이해하는 데에 꽤 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계속해서 보고 있다."
가슴이 콱 막혔다. 그의 마음 한 켠에 쌓인 케케묵은 먼지가 바람에 날려 흩어짐을 느꼈다. 한국을 떠나던 날, 흘렸을 눈물이 먼지에 섞여 눈앞이 흐릿해졌을 아이가 보였다. 상처와 눈물이 없는 어린 시절이 혼자 겪는 일은 아니었을 테다. 성인이 된 캔디 씨는 그를 둘러싼 편견을 뒤로한 채 담담히 자신의 인생길을 걷기로 했다.
예술가에서 법학도가 되기까지
캔디 씨는 현재 로스쿨 3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이다. 학부에서는 문학과 조형예술을 복수 전공했고 석사는 미술 비평으로 학위를 받았다. 문학과 예술을 공부해 예술 분야로 나가던 캔디 씨에게 로스쿨 입학은 조금 특이한 이력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문학과 미술비평을 전공했지만, 프리랜서로 일하기는 조금 힘들었다. 잡지 편집부에서 일을 하면 좋지만 굉장히 치열하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시기 서점에서 대학원 입시 책들을 보게 되었다. 그중에 눈에 띈 게 LSAT(법대입시시험) 책이었다.
굉장히 흥미로웠다. LSAT은 법 지식을 물어보는 게 아니라 대부분 논리적인 질문들로 채워진다. 마치 퍼즐을 푸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 뒤로 책을 사서 하나하나 풀어보았다. 그 모습을 본 엄마의 친구가 법대에 지원해보라고 권유해 시험을 치렀다. 성적이 꽤 잘 나와 상당한 장학금을 받았다. 저렴하게 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진학을 고민했다."
그는 로스쿨에 가게 된 과정을 '재미있는 스토리'라고 표현했다. 흥미로 시작하여 우연한 기회에 로스쿨에 시험을 보고 합격까지 했지만, 꼭 법대에 가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입학 결심을 굳히게 한 하나의 동기가 생겼다.
"서울시 교육감 선거가 6월 3일에 있었다.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건 5월 31일이었다. 이 글이 여파를 몰고 올 거라는 짐작은 했었지만, 한국 시민들이 내가 법대에 진학하게 되는 걸 알면 내 말과 글이 더 신뢰가 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 시민들이 알아줬으면 했고, 내 진심을 더 믿어주길 바랐다."
그는 한국 시민들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중대한 진로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줄 만큼 간절했다. 그건 진실을 향한 갈망이었다. 법대생의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그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세월호 활동가로 살아가는 이유
▲ "나는 세월호 사건을 뉴스에서 찾아보다가 서울시 교육감 후보로 아버지가 나온 것을 알게 됐다. 당시 한국 시민들은 한창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된 아이들을 추모하고 있었다. 그런 기간 내가 쓴 글 때문에 세월호 뉴스가 묻히는 느낌이 들어서 굉장히 미안했다. 세월호 희생자 추모는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실이 규명되고, 유가족들에게 정확한 답변과 보상이 있을 때까지 나도 내가 있는 장소에서 계속 참여할 것이다." | |
ⓒ <뉴스 M> 유영 |
캔디 씨가 글을 올린 2014년 봄은 세월호 사건으로 전 국민이 슬픔에 빠져있던 때였다. 그는 두 사건이 겹쳤는지 매우 슬픈 눈으로 말했다.
"나는 세월호 사건을 뉴스에서 찾아보다가 서울시 교육감 후보로 아버지가 나온 것을 알게 됐다. 세월호 사건은 4월에 일어났고, 페이스북에 글을 쓴 것은 5월이었다. 당시 한국 시민들은 한창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된 아이들을 추모하고 있었다. 그런 기간 내가 쓴 글 때문에 세월호 뉴스가 묻히는 느낌이 들어서 굉장히 미안했다. 세월호 희생자 추모는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실이 규명되고, 유가족들에게 정확한 답변과 보상이 있을 때까지 나도 내가 있는 장소에서 계속 참여할 것이다."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진정성을 증명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캔디 씨는 당시 결심한 대로 로스쿨에 다니고 있다. 그리고 세월호 진실 규명을 위해, 더불어 그가 품은 미안한 감정을 행동으로 옮기는 활동가가 되었다. 옳다고 생각한 그대로 행동했고, 그 행동의 진실성을 위해선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캔디 씨의 인생을 어느 누가 정치적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뉴욕 지리에 어두운 기자 대신 캔디 씨는 인터뷰 장소 섭외까지 담당했다. 그의 지인들이 하는 카페, 미용실 등을 소개해 주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장소를 제공해 준 한인 예술가 친구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캔디 씨는 영락없는 보통 한인 청년이었다. 한국에 대한 아련한 기억은 그에게 아름다움으로 남았다. 여전히, 앞으로도 계속 한국에 관심을 두고 활동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했다.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11세 소녀는 어느새 미국에 정착한 한인 청년이 됐다. 20여 년 동안 미국 땅에서 지냈다. 그 세월 동안 과연 캔디 씨는 어떻게 살았을까. 그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졌다. 우리는 한 번 더 만나기로 했다. 어느 유명인의 딸 '캔디 고'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캔디 고'를 만나러 가는 길이 무척 설렐 것 같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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