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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동? 간첩? 내란? 5.18 진상 담은 '20분 영상'

5.18기념재단·기억하겠습니다 5·18, 35주년 기념 영상 공개

15.05.18 21:26l최종 업데이트 15.05.19 09:00l


'기억하겠습니다 5.18' 캠페인을 벌여 온 동명의 페이스북 페이지(바로가기)가 18일 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 영상을 공개했다(관련 기사 : "1980년에 SNS가 있었다면" 조국도 함께한 캠페인).

5·18기념재단과 함께 영상 제작 작업을 진행한 '기억하겠습니다 5.18'은 "5.18민주화운동을 기억한다는 것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박제화하는 것이 아니라, 2015년 지금 여기 우리의 삶으로 그 정신을 실천해가는 것입니다"라면서 영상을 페이스북과 유튜브에 올렸다(유튜브에서 보기).

"지금 광주 큰일났습니다. 군인들이 시민들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화면으로 시작하는 영상은 5.18민주화운동의 경과와 의미를 여러 근거와 증언을 빌려 설명하고 있다.

영상에는 5·18 생존자와 희생자 가족은 물론, 당시 계엄군이었던 5.18 최초 양심선언자도 출연해 5.18의 진상을 증언했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홍구 한신대 교수, 최정운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임철우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순태 소설가, 나경택 당시 <전남매일신문> 사진기자, 안종철 5.18기록관 추진기획단 자문위원 등도 목소리를 보탰다.

영상 말미에는 캠페인에 참여한 이들이 '기억하겠습니다 5.18'이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찍은 사진 여러 장과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장면이 담기기도 했다.

아래는 영상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5.18, 현행법이 규정한 명백한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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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 영상, <기억하겠습니다 5·18>.
ⓒ 5.18기념재단, 기억하겠습니다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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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그때 우리에게 SNS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나경택 "그 당시에 그런 게 있었으면 정말로 광주의 진실이 바로…."

2014년 11월 SNS를 통해 전세계로 확산된 미국의 퍼거슨 시위. 2011년 1월 이집트가 이뤄낸 페이스북 혁명. 2002년 한국 여중생 추모 촛불집회. 함께 지켜봐주고 함께 응원하는 마음 안에서 불필요한 폭력은 사라졌고, 새롭고 힘찬 가능성이 시작됐습니다. 끝을 알 수 없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네트워크. 그 개방적 확장성이 민주주의가 발전해나갈 수 있는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의 민주주의는 완전히 고립돼 있었습니다.

피로 물든 역사가 지나가고 그 자리에 자유라는 꽃이 피어났습니다. 쾌적한 환경, 자유로운 분위기, 소중한 권리를 지켜주는 법과 제도, 그 모든 것들 틈 사이사이, 아직 마르지 않은 이전 세대들의 핏방울들이 스며 있죠. 5.18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와 자유를 활짝 꽃피우게 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조국 : "5.18은 현행 법률과 판례에 따라서 민주화운동으로 명백히 규정돼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나라 대법원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5.18은 폭동이나 내란이나 간첩 이런 게 아니라 민주화운동의 중심적 사건으로 규정돼 있습니다."

2011년 5.18민주화운동의 기록물들이 한국 현대사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5.18에서 나타난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 민주, 평화의 정신이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공유되고, 계승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절대로 잊혀서는 안됩니다. 인류의 양심과 기억의 일부분으로 영원히 남아있어야 합니다." - 로슬린 러셀 박사(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장)

"어떻게 사람에게 택배네, 썩은 홍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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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 영상, <기억하겠습니다 5·18>.
ⓒ 5.18기념재단, 기억하겠습니다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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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들의 뚜렷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신군부가 계획적으로 전파한 5.18에 대한 부정적인 첫 인상은 오늘날 지역적, 정치적 갈등의 요소로 남아 희생자들을 괴롭힙니다.

김점례(고 장재철 열사 어머니) : "어떻게 사람을 갖고 택배네, 일광욕을 허네, 썩은 홍어에다 비교를 해서 쓰겄어. 오메, 글 안해도 기가 맥히고 그런데 그런 소리르 들으니 난 몇날, 며칠 잠을 못 자고, 밥을 못 먹고. 기가 콱 맥혀부러갖고."

유족들을 가장 외롭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무관심과 무지.

문건양·김길자(고 문재학 열사 부모) : "몰라도 너무 모르죠. 너무 모르고. 우리 지역에서만 알지 다른 데서는 모르잖아요."

1980년 5월 당시에도 다른 도시의 사람들은 광주의 진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신군부에 의해 시외전화가 두절됐고, 광주로 들어오는 모든 육로도 완전히 차단됐기 때문입니다.

임철우(소설 <봄날> 저자, 5.18 당시 전남대 4학년) : "광주 바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여기서는 이 난리가 일어나고 있는데, 이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바깥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설마 (광주의 상황을) 모르겠는가? 그렇게 생각했죠, 당연히."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이듬해, 정권을 차지한 군부의 중심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3선 개헌, 유신헌법, 긴급조치. 폭압성을 더해가던 그의 독재에 시민들은 저항했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정권은 부하 김재규의 총탄과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12.12 군사쿠데타는 민주화를 열망하던 전국의 대학생들을 1980년 5월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국민의 기대와 요구를 저버린 신군부의 계엄령 확대로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정문 앞에서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그 열흘 간의 악몽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안종철(전 5.18 기록물유네스코 등재 추진단장) : "타 지역에서 5.18을 조금씩 알아가는 게 1985년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 저)라는 책이 발간되지 않습니까.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됨에 따라서 518의 진실을 좀 알기 시작했고."

1988년 형성된 여소야대 정국. 야당은 12.12쿠데타와 5.18민주화운동을 쟁점화시켰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른바 광주 청문회를 통해 그 동안 왜곡되고 은폐됐던 진실들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1997년 4월 17일 전두환은 무기징역을, 노태우는 징역 17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총기 수없이 풀려도, 어디 한 군데 털린 곳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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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 영상, <기억하겠습니다 5·18>.
ⓒ 5.18기념재단, 기억하겠습니다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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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자가 처벌되기까지 걸린 17년의 세월. 5.18민주화운동의 역사는 침묵의 역사이자, 왜곡의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도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위대한 항쟁의 힘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마침내 평화의 역사, 민주주의의 역사로 바꿨습니다. 이제 우리가 기억하겠습니다.

한홍구 : "공권력이 완전히 무너졌어요. 총기가 수천 정이 풀렸어요. 그런데 은행, 금은방, 슈퍼마켓, 전당포, 어디 한 군데 털린 데가 없었습니다. 말이 안 되는 얘기에요. 말이 안 되는 높은 도덕성이에요."

송희성 오월민주여성회장 : "보급도, 장사도 안 되고, 교역이 안 되니까 집집마다 쌀이 떨어질 거 아닙니까. '쌀 없어' 그러면 '응 내 거 같이 먹어' (그러고), '김치 없어' 그러면 김치 갖다주고. 대동정신이 살아난 거예요. 정말 나는 그런 세상 한 번 다시 살고 싶어요."

하지만 신군부는 대동세상을 꿈꾸며 평화를 지켰던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5월 21일 자정, 시외전화가 일제히 두절됐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시민들이 도청 앞에서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던 오후 1시, 스피커에서 돌연 애국가가 흘러 나왔습니다. 공수부대는 애국가를 배경으로 2만여 명의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시작했습니다.

이경남 평택 효덕감리교회 목사(오일팔 당시 계엄군, 계엄군 최초 양심선언자) : "제가 광주 전남도청 지하실에 내려가 쉬고 있었어요. 지하에 있는데 갑자기 애국가를 틀더라고. 그래서 내가 '아니 왜 갑자기 무슨 방송이 나오나', 이상하게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근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애국가를 틀면서 사격을 했다고 그러더라고."

나경택 : "그때 (내가) 계엄군들 사이에 들어갔었습니다. 12시는 넘었고, 1시는 못 됐었습니다. 그때 차 모 대위, 아주 잘생긴 대위였습니다. 차아무개 대위가 '야 통신병, 발포명령 어떻게 되는 거야' 막 다그치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근데 통신병이 '아직 발표명령이 없습니다' 그런 거예요. 그러다 한 10분 후에 '발표 명령입니다' 하더라고. (차 대위가) '그래?' (하는) 그 순간에 이제 막 총으로 갈겨대고 그랬죠."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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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 영상, <기억하겠습니다 5·18>.
ⓒ 5.18기념재단, 기억하겠습니다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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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7일 자정, 광주 전역의 시내전화가 두절됐고, 오전 3시 신군부가 탱크와 헬기를 동원해 도청을 조여왔습니다. 오전 4시 10분 공수부대의 일제 사격으로 시작된 최후의 항쟁. 그곳을 마지막까지 지킨 이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끝내 인간의 존엄성을 지켰습니다.

최정운 :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게 인간의 존엄성이라고 하는 것,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로서의 어떤 가치, 그게 사실은 생명보다 더 중요한 거고, (전남도청 안 최후의 시민들은) 그걸 지키려고 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양인화씨(평화반점 운영, 518당시 도청 항쟁 생존자) : "깨끗이 입고 죽어야 천당에 간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옷 갈아입고 이모님한테 '저 주민등록증 넣고 가니까 아버지한테 내 시체라도 가져가라고 하슈' 말했죠. 근데 이렇게 살아있네요. 아유, 목이 메일라 그러네. '내가 오늘 여기서 죽음으로써 광주시민 아니면 내 형제가, 많은 사람이 살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만 가졌지…."

조국 :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두 개의 축이 뭘까 생각하면 한편으론 권위주의 정권으로부터의 결별인 것이고, 하나는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거든요. 이걸 잊는 민족, 나라는 희망이 없는 거죠."

피와 통곡의 역사위에 피어난 꽃, 자유. 그 자유가 우리에겐 묻습니다. 당신은 현재만을 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입니까.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 과거를 되풀이할 운명에 처한다." - 조지 산타야나

정부는 518민주화운동 관련 공식 사망자 수를 165명으로 발표했지만 암매장으로 인한 행방불명을 고려하면 추측되는 사망자 수는 훨씬 많습니다. 35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최초 발포를 명령한 책임자가 누구였는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오마이뉴스 

Posted by 어니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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