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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동료의 무서운 충고...한국에서 펼쳐졌을 지옥도 [이봉렬 in 싱가포르]

입력2024.12.17. 오전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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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렬 in 싱가포르] 독재 위한 대통령의 계엄 선포, 나라를 어떻게 망가뜨리나2006년 싱가포르에 직장을 구해 이민 온 후 지금부터 스무 해 가까이 됐습니다. 반도체 관련 장비와 부품을 공급하는 작은 회사였는데, 사장이 한국 사람이라 직원들도 한국 사람이 많았습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직원 중 한국 다음으로 많은 국적은 싱가포르가 아니라 필리핀이었다는 겁니다. 모두 필리핀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온 나름 엘리트였는데 회사에서는 주로 장비를 담당하는 엔지니어 역할을 했습니다.

회사에만 필리핀 사람이 많은 게 아니었습니다. 싱가포르에는 약 200만 명 정도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중 25만 명 정도는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온 가사도우미입니다. 20년 전만 해도 가사도우미는 대부분 필리핀 사람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이 되면 가사도우미들은 시내 길거리나 공원에 모여 휴식을 취합니다. 사진 출처 HOME(Humanitarian Organization for Migration Econom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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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력에 영어를 쓰는 필리핀 여성들이 싱가포르 가정에서 식사 준비나 청소는 물론이고 육아와 노인 간병까지 도맡아 했습니다. 싱가포르 전체 인구의 4% 정도가 필리핀 국적의 가사도우미였으니 필리핀 여성은 곧 가사도우미라 여겨질 만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지금은 좀 달라졌습니다. 필리핀보다 더 임금이 싼 미얀마나 인도네시아에서 온 여성들이 주로 가사도우미 자리를 차지하면서 필리핀 국적의 가사도우미 수가 크게 줄었습니다.

그렇다고 필리핀 여성들에게 다른 일자리가 생긴 건 아닙니다. 가사도우미 혹은 식당 일을 위해 싱가포르 대신 한국이나 다른 나라를 찾는 걸로 바뀐 것입니다.

한국과 필리핀

  지난 6일(현지시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이 마닐라 말라카낭 대통령궁에서 연설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하지만 반도체 회사를 비롯한 제조업 분야에서 필리핀 출신 엔지니어들에 대한 수요는 여전합니다. 동남아 국가 중 교육 수준이 높고, 기술이 뛰어나며, 영어가 통하기 때문입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필리핀에서 구할 수 있는 변변한 직장이 없는 것도 싱가포르에 필리핀 엔지니어들이 몰려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도 반도체 팹으로 직장을 옮겼지만 여기서 함께 일하는 엔지니어의 대부분이 필리핀 출신입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일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됩니다.

음식이나 여행, 문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서로 좋은 점을 추켜세워 주고 은근히 자국의 장점을 내세우며 대화가 흘러갑니다. 특히 케이팝과 넷플릭스를 통해 전해지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는 필리핀 동료들도 한국이 최고라고 입을 모읍니다.

하지만 정치 이야기를 할 때는 좀 다릅니다. 우리가 볼 때는 그래도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시아에서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필리핀 동료들은 한국이나 필리핀이나 뭐가 그리 다르냐는 식으로 받아칩니다.

2016년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필리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저는 그가 한국의 전두환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를 섞어 놓은 것 같다며 어떻게 그런 인물이 대통령이 될 수 있냐고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필리핀 동료들은 두테르테가 필리핀의 구악을 해소할 적임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너무 폭력적이지 않냐고 물으니 이명박 정부 당시 서울 광화문에 컨테이너를 쌓아 시민들을 막았던 명박산성이나 전쟁과 같았던 용산참사를 이야기하며, 두테르테는 최소한 선량한 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응수했습니다.

얼마 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가 필리핀 대통령이 됐을 때는 어떻게 나라를 망가뜨린 독재자의 아들을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냐는 저의 지적에 독재자의 자식을 대통령으로 뽑은 건 한국이 먼저라고 답하는 바람에 할 말을 잃기도 했습니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윤석열의 말을 머리기사로 보도한 싱가포르 <스트레이츠 타임스>
ⓒ 스트레이츠 타임스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붉게 충혈된 눈으로 회사에 출근했더니 만나는 필리핀 동료마다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한국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국회에 의해 계엄이 해제되기는 했지만 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정신이 이상해진 독재자가 계엄을 선포했으나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답게 국회가 막았으니 대통령은 곧 탄핵당해 물러날 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동료들은 부디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면서 이제껏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필리핀에서도 대통령에 의한 계엄 선포가 있었다는 겁니다.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장기독재를 했고, 그 가족은 구두 수백 켤레로 상징되는 사치를 일삼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 장기독재의 시작이 대통령의 계엄선포로 시작됐다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평소 정치 이야기를 해도 농담을 섞어 가볍게 하던 그 동료는 계엄 상태에서 나라 꼴이 어떻게 되는 지를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해 줬습니다.

  2016년 2월 26일(현지시간) 필리핀 케손시티에 있는 피플 파워 체험 박물관에서 한 방문객이 계엄 희생자들의 사진을 보고 있다. 1972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의 계엄 선포부터 1986년 평화 혁명까지 다각도로 체험할 수 있는 이 박물관은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피플 파워 혁명 3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 연합뉴스

1972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이 장기독재를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고 의회를 해산했습니다. 계엄 해제까지는 10년, 독재자 마르코스가 쫓겨나기까지는 무려 14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인권 단체인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필리핀의 계엄 기간 동안 약 7만 명이 투옥되었고 3만 4000명이 고문당했으며 32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사람들 목숨만 빼앗은 게 아닙니다. 경제도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르코스가 집권한 1965년 필리핀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98달러로 한국의 105달러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됐습니다. 1981년 필리핀의 계엄이 해제되던 해의 1인당 GDP는 815달러, 한국의 GDP는 1883달러로 이번에는 한국이 필리핀의 두 배 이상이 되었습니다.

계엄과 장기독재로 인해 꺼져버린 성장동력은 독재자가 물러난 이후에도 다시 살아나지 못해 2023년 필리핀의 1인당 GDP는 3725달러로 한국의 3만 3121달러에 비하면 12%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12%의 GDP도 외국에서 남자는 엔지니어로 여자는 가사도우미로 일해 부친 돈으로 겨우 만든 것입니다.

  한국과 필리핀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 세계은행

대화를 마친 필리핀 동료는 끝으로 이 말을 제게 했습니다.

"너희는 필리핀처럼 되지 마라."

저는 '걱정 말라'고, '우린 대통령을 탄핵할 것'이라고 답했지만 사실 걱정이 컸습니다. 국민의힘 의원들의 방해로 탄핵소추안 표결에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난 14일 오후, 계엄 발표 이후 11일 만에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습니다. 필리핀은 계엄 후 의회가 해산됐지만, 우리 국회는 계엄을 해제했고 불법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을 탄핵했습니다. 이제 헌법재판소의 심리만 남았습니다. 탄핵 인용으로 내란죄 수괴를 완전히 끌어내린다면 제2의 필리핀은 되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 남은 여정에서도 우리 국민 모두가 자랑스런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여 줄 거라 믿습니다.

이봉렬(solneu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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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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