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AS] 10장면으로 다시 보는 ‘임을 위한 행진곡’ 수난기
등록 :2017-05-17 10:56수정 :2017-05-17 10:59
1. 슬프고도 아름다운 진혼곡, 임을 위한 행진곡
1982년 2월20일 광주 옛 망월동 5·18 묘역에서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신랑 신부는 모두 죽고 없는 ‘영혼결혼식’이었습니다. 신랑은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인 1980년 5월27일 전남도청에서 최후를 맞은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당시 30살), 신부는 그와 함께 노동운동 활동을 하다 1978년 사망한 박기순(당시 20살)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광주 지역 최초의 노동야학 ‘들불야학’에서 교사로 함께 활동했습니다. 박기순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지고, 윤상원은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여/왜 말없이 눈을 감고만 있는가/두 볼에 흐르던 장밋빛/늘 서럽도록 아름다웠지/….”
아끼던 동료가 먼저 떠나고 2년 뒤, 윤상원은 광주 민주화운동 한가운데에 섰습니다. 그의 마지막을 목격한 프랑스 <르 몽드> 기자 등은 그를 “침착하고 합리적이며 논리정연한 청년”으로 기억했습니다. 1980년 5월28일 미국 <볼티모어선>은 1면 머리기사에서 “이 청년이 죽는다면 그것은 한국의 큰 손실이 될 것이다”고 썼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 아까운 두 청춘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영혼결혼식 소식을 들은 소설가 황석영씨와 당시 전남대생이었던 김종률·오정묵·김선출씨 등 10여명은 같은 해 4월 황씨의 광주 자택에 모여 둘의 넋을 위로하는 노래극 <넋풀이-빛의 결혼식>을 만들었습니다.
2014년 광주광역시가 제작한 4분47초 분량의 유시시(UCC).
‘임을 위한 행진곡’은 노래극의 마지막 합창곡입니다. 김종률 현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이 작곡하고 가사는 백기완 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980년 12월 서대문구치소 옥중에서 지은 장편시 ‘묏비나리’ 일부를 차용해 황석영씨가 붙였습니다. 노래극은 당시 2천개의 테이프로 녹음돼 전국에 건네졌고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습니다.
2. “빼앗긴 자의 노래” 세계에 울려 퍼지다
“이 노래는 듣는 노래가 아니라 부르는 노래다. (…) 혼자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함께 부르는 노래다. (…) 가진 자의 노래가 아니라 빼앗긴 자의 노래다. 이 시대에 억압이 있는 곳에선 언제나 이 노래가 그치지 않았던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주철환 당시 문화방송(MBC) 피디는 1989년 6월29일치 <한겨레> 칼럼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함께 불러 생명력을 잃지 않았던 ‘임을 위한 행진곡’은 국내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국가에도 널리 퍼졌습니다.
1989년 6월21일치 <한겨레> 기사를 보면 대만, 홍콩 등 일부 동남아 국가의 민권운동가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애창하는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됐습니다. 이들에게 한국은 ‘아시아 민권운동의 선진국’으로 인식되고 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은 그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지난해 5월 <동아일보>가 소개한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의 ‘임을 위한 행진곡의 세계화 : 홍콩 대만 중국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봐도 그렇습니다. 이 논문에 따르면 홍콩, 대만, 중국, 캄보디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7개국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악보를 자기 나라에 맞게 만들어 부르고 있고 애창하는 국가도 10여 개국이나 된다고 합니다.
3. 악보가 필요 없던 노무현 전 대통령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1997년 5월7일 국가기념일로 제정됐습니다. 유공자유족회 추모제에서 제창되던 ‘임을 위한 행진곡’도 1997년부터는 정부 공식 기념식에서 제창됐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5년 동안 매년 5·18 기념식을 찾았습니다. 악보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는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꼿꼿이 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습니다.
2004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식 동영상.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달랐습니다. 2004년 노 전 대통령과 함께 기념식에 참석한 그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되는 와중에 고개를 숙인 채 종이만 볼 뿐이었습니다. 제창은 2016년 국가보훈처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반대하며 말한 것처럼 “참여자들이 의무적으로 부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 겁니다.
4. 단 한 번 참석 뒤 발길 끊은 두 명의 대통령
노래를 부르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발길도 끊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2013년 한 차례 5·18 기념식에 참석했습니다. 2004년과 마찬가지로 일어서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경청하되 따라부르지는 않았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어땠을까요. 이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08년 5·18 기념식에 참석해 ‘임을 위한 행진곡’ 두세 소절을 따라불러 당시 언론들이 주요하게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그 역시 퇴임까지 다시는 기념식을 찾지 않았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수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5. 제창 금지, 대체곡 공모 시도
5·18 기념식을 주관하는 국가보훈처는 2009년 갑작스레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합창단 합창으로 바꿉니다. 본행사였던 것을 식전공연으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2011년 다시 본행사로 돌아왔지만 제창은 금지됐습니다. 보훈처는 “원하는 사람은 합창단을 따라부르라”고 말했습니다.
보훈처가 기대한 결과가 이런 것이었을까요. 2014년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기 위해 일어난 사람은 박준영 당시 전남지사, 오형국 광주시 행정부시장 등 7명뿐이었습니다. 2015년 기념식에서 박 전 대통령을 대신해 정부 대표로 참석한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박 전 대통령을 대신해 정부 대표로 참석한 황교안 국무총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보훈처는 2009년 12월과 2013년 4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대체하는 공식 추모곡(기념노래)을 공모한다고 밝혔다가 철회하는 등 ‘임을 위한 행진곡’ 지우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2013년 6월 ‘임을 위한 행진곡 5·18 기념곡 지정 촉구 결의안’이 여야 의원 158명 찬성으로 본회의에서 통과됐지만 보훈처는 ‘버티기’로 일관했습니다.
6. 보훈처, 보수단체와 입을 맞추다
도대체 왜?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2014년 2월24일 보훈처가 국회 정무위원회에 낸 ‘5·18 기념곡 지정 추진사항 보고’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보훈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북한이 만든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의 배경음악이며, 북한의 통일노래 100곡집에 수록됐고, 작사자(황석영) 등의 행적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는 노래”라는 등의 부정적 의견을 전했습니다. 특히 “노래 제목과 가사인 ‘임’과 ‘새날’ 의미를 두고 논란이 있다”고 했습니다. ‘임’이 김일성을 지칭한다는 겁니다.
이 황당한 ‘북한 연관설’은 같은 해 4월9일 고스란히 반복됐습니다.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등 69개 보수단체는 <조선일보> 등 일부 신문에 낸 광고에서 보훈처와 똑같은 이유로 “‘임을 위한 행진곡’ 기념곡 지정을 반대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2008년부터 “대통령 참석 행사에서 주먹을 쥐고 흔들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문제제기를 해왔습니다.
7. “북한에선 금지곡” 반박이 나오다
보수단체의 주장은 근거가 극히 빈약합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에 만들어졌고 북한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는 훨씬 뒤인 1991년 제작됐습니다. 북한의 통일노래 100곡집 수록이 이유라면 북에서 즐겨 부르는 ‘아리랑’도 문제가 될 겁니다.
무엇보다 이들의 주장은 북한 이탈주민들이 직접 반박하고 있습니다. 김일성대를 졸업한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는 지난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북한에서 허락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면 잡혀가 정치범이 된다. 별 소재를 다 가져다 김일성 찬양하는 것이라 선전하는 북한도 이 노래가 김일성을 흠모한다고 말하진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지난 15일 하태경 바른정당 의원이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공개한 태영호 전 영국주재북한공사의 말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태 전 공사는 “1990년대 초까지 북한 대학생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굉장히 많이 불렀지만 노래에 깔린 저항·반항 정신 때문에 지금은 금지곡으로 지정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보훈처는 보수단체의 주장을 “찬·반 양론이 있다”며 계속 키웠습니다. 2016년 보훈처는 또다시 합창 방식을 고수하며 “‘임을 위한 행진곡’ 찬·반 의견이 첨예하게 나뉘는 상황에서 참여자들에게 의무적으로 부르게 하는 ‘제창’ 방식을 강요해 또 다른 갈등을 유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보훈·안보단체와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겨레>는 2016년 5월18일치 사설을 통해 “제창을 반대하는 사람은 5·18을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이라고 주장하고, 희생자 주검을 홍어에 비유하는 극소수의 무리뿐이다. 그런데도 청와대와 보훈처는 반인륜적이고 패륜적인 무리를 5·18 유족 및 유공자들과 동렬에 놓고 사고하고 있다”고 보훈처를 비판했습니다. 하 의원은 보다 직접적으로 “보훈처가 유언비어를 직접 유포하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8. 두 쪽으로 갈라진 기념식
9년간 제창이 가로막히면서 5·18 기념식도 두 쪽으로 갈라지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5·18 부상자회, 구속부상자회, 유족회 등 5월 단체들이 수차례 기념식을 보이콧했고 2015년에는 보훈처 주관 기념식에 공식적으로 불참 선언을 하고 별도의 기념식을 열었습니다. 한 유족은 “해괴한 논리로 상처를 덧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정춘식 유족회장은 “노래 한 곡 자유롭게 부를 수 없는 나라”라고 한탄했습니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는 2016년 5월21일치 <한겨레> ‘정문태의 제3의 눈’ 칼럼에서 “10년 넘게 아무 탈 없이 불리던 노래가 2009년 난데없이 푸대접받기 시작해서 박근혜 정부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길바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목놓아 불러본 적도 없고, 그리하여 민주주의 가치를 몸소 느껴본 적도 없는 자들을 대통령이라 부르는 우리 시대의 불행”이라고 썼습니다.
9. 박승춘 보훈처장, 기념식에서 쫓겨나다
2015년 별도의 기념식을 열었던 유족회 등 5월 단체들은 지난해 다시 보훈처 주관 기념식에 참석했습니다. 대신 박승춘 당시 보훈처장을 기념식에서 내쫓았습니다.
왜 그는 기념식에서 쫓겨났을까요. 그는 2011년 2월 보훈처장이 된 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거부하고 기념곡 지정 요구마저 묵살해 온 장본인입니다. 2010년, 2015년, 2016년 총 세 차례 국회에서 ‘박승춘 해임촉구결의안’이 발의됐지만 박 전 대통령은 끝까지 그를 곁에 두었습니다.
기념식에서 쫓겨나던 박 전 보훈처장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은) 유족들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당사자들 의견도 중요하나 이 기념식은 정부 기념식이다. 당사자분들 기념식이 아니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10. 문재인 대통령, 제창 지시를 내리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2일 제37주년 5·18 기념식의 제창곡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지정하여 부르도록 주무 부처인 국가보훈처에 지시했습니다. “정부 기념일로 지정된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그 정신이 더 이상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반영됐다고 청와대는 밝혔습니다. 앞선 11일에는 박승춘 보훈처장을 경질했습니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새 정부의 국정방향이나 철학과 맞지 않는 분”이라고 경질 이유를 밝혔습니다.
2017년 5월18일 5·18 기념식에서는 모두가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릅니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95055.html?_fr=mt2#csidxfc63f9ba67260e696d9720466e567bb